낙락자 난합난분 흔흔자 이친이산

落落者 難合難分(낙락자는 고분거리지 않고)
欣欣者 易親易散(흔흔자는 듬직하지 못하다)

이는 채근담(菜根譚)에 나오는 말이다. 그 책을 읽어본 사람은 누구나 함께 느낄 수 있는 바이지만 한번 읽기 시작하면 눈을 떼기 어렵다. 거기에 서술되어있는 글귀 한 구절도 비켜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해서 채근담은 시간과 공간개념을 뛰어넘어 고금의 시대를 이어가는 명저로 평가 받는 것이 아닌가 싶다.

채근담을 읽어서 마음을 깨우친 사람의 경우일수록 대화의 폭이 넓어지고 다른 사람들의 의사도 보다 잘 이해하며 역지사지(易地思之)하는 도량도 크다다는 것을 옛 분들은 자주 귀띔해주곤 했다.

정치지도급 인사들 가운데 그 사람이 무슨 책을 탐독했느냐 하는 것은 가끔 알려지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공산진영국가의 지도자들이 무슨 책을 탐독했느냐하는 것은 별로 알려져있지 않다. 일반적으로 혁명관계서적을 많이 읽었다고 말하는 이들이 많다. 그러나 그런 종류의 서적은 탐독 대상 서적으로 간주하는 이가 거의 없다. 왜냐하면 경전급(經傳級)에 속하지 않기 때문이다. 경전급의 전적(典籍)을 소중히 여기는 이유는 한 사람의 서술이 아니라 수많은 성현급 학자들의 토론과 평가를 거쳐서 집성된 것이기 때문에 가장 객관성이 있다는 데서이다.

많은 사람들이 의아스럽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지만 모택동의 애독서는 채근담과 용제수필(容齊隨筆)이었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잔인하다고 여겨지는 공산주의 혁명지도자가 채근담을 탐독했었다는 것은 얼른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로 인정되고 있다. 모택동이 사경(死境)을 헤매다가 어느 날 정신이 돌아왔다. 그 때가 죽기 13일전이었다. 의식을 거의 정상상태로 회복한 모택동은 첫 마디가 “내 책 가져오라” 그 책이 바로 채근담과 용제수필이었다. 용제수필은 널리 알려져 있지 않지만 중국의 역사적 사실을 간단 간단하게 수필형식으로 기록해 놓은 책이다.

모택동은 그 책을 언제나 침대 머리에 두고 수시로 읽었다 하여 그 책을 모택동의 침변서(枕邊書)라고 한다. 누구에게나 책읽기를 좋아하는 이에게는 탐독서가 있다. 그 탐독서는 수시로 읽는 책이기 때문에 머리 밑에 두기 일 쑤다. 그런 것들을 일컬어 침변서(枕邊書)라고 한다.

정치지도급 인사 가운데 침변서가 없다면 그것은 한마디로 말해서 서글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책을 가까이 하지 않는 이가 정치지도급 인사라고 한다면 그들에게는 신뢰와 기대를 지니기 어렵다. 그리고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일수록 얻어들은 풍월을 지식자원인양 착각하고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옛 성현들은 그런 이들을 가리켜 구이지학(口耳之學)의 무리라고 했다. 우리나라 역사상 유일하게일사(逸士)로 중외에 널리 알려진 바 있는 남명(南冥) 조식(曺植:1501-1572)선생은 그런 이들의 지식을 가리켜 이저지학(耳底之學)이라고 했다. 즉 근거도 원리도 모르고 귓전에 떠도는 말이라는 뜻이다. 그들의 일반적인 특징은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고 입으로 또는 말로 때우는 무리들이기 때문에 안 되는 일 도 없거니와 되는 일도 없다.

요즈음에는 그런 부류를 복지부동(伏地不動)이라 하거니와 이율곡 선생은 일지부동(一指不動)이라 하였고 지식수준이 낮거나 사리 판단력이 정확하지 못한 식자층을 일컬어 속유(俗儒)라고 했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도 일지부동하면서 줄서기에 급급해하는 군상이 우글거리고 자기 직분에 상응하는 정보소화능력의 미흡으로 사회적 기대에 못 미치는 이들이 많은 듯이 보인다.

그런 사람들은 거의가 흔흔자(欣欣者)이기 때문에 정중하지 못하고 모든 일을 함에 있어서 직석결론을 좋아하는 경향이 있음으로 매사에 듬직하지 못하다. 따라서 그들은 권략이 있는 이들에게는 쉽게 다가가고 그 권력이 쇠잔하면 쉽게 흩어진다. 인사정책면에서 심숙(深熟)히 고려하고 살펴봐야 할 대상임을 기억해야 한다. 그런 부류의 사람들을 일컬어 이친이산자(易親易散者)라고 한다.

이른바 고분고분하지 않는 낙낙자는 권력 앞에서도 쉽게 몸을 낮추지 않고 상황여하에 따라 쉽게 소신을 바꾸지도 않는다. 눈 여겨 볼만한 인물임에 틀림이 없다. 인재 및 적인(適人)은 일차적으로 낙낙자 중에서 찾으려는 노력과 성의를 기우리는 것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흔흔자(欣欣者)들은 비교적 속마음인 듯한 감정표현을 통하여, 이른바 이 한 목숨 바쳐서, 충성을 맹서하는 변술(辯術)을 통하여 상대방의 판단을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위장술(僞裝術)이 뛰어나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속아 넘어가기 쉽다.

역사적인 사례를 하나 든다면, 유세가(遊說家)가로서 전국시대를 주름잡아가며 여러 군주들을 현혹시켜왔던 소진(蘇秦:?-248 B.C)과 장의(儀:?-310 BC)의 이야기를 제쳐놓고 지날 수가 없다. 소진은 당시 진시왕에 의한 6국통합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연조제위한초(燕趙齊魏韓楚)등 6개국이 합종(合縱)해야 한다고 설득하여 그 6개국에서 정승대우를 받으며 호강을 누리기도 했다. 그러나 동맹논리를 내용으로 하는 장의(張儀)의 연형책(連衡策)과 충돌하면서 소진의 위장술에 의한 이간책이 들통 나자 소진은 결국 살해당하고 말았다.

오늘날 글로벌 시대적인 논리에 따라 경제협력은 말할 나위도 없거니와 국가존립에 관련된 안보체제 유지 면에 있어서도 상호간의 유대와 결속을 강화해 나가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니만큼 그와 같은 상황관리능력을 지닌 사람을 찾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쉽지 않다고 뒤로 미루거나 방심해서는 안 되며 언제나 초급지사로 여겨야 한다.

하늘은 그 시대에 필요한 사람을 반드시 출생시킨다고 했다. 다만 어떻게 찾아서 등용하느냐 하는 문제는 각급 임용권자의 몫이다. 안자춘추(晏子春秋)를 지은 안자의 삼불상(三不祥)이 떠오른다. 3가지 불상하다는 것 중,

첫째는 유현부지(有賢不知)로서 어진 인재가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지낸다는 것이요,

둘째는 지현불용(知賢不用)으로서 어진 인재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등용하지 않는 것이요,

셋째는 용이불임(用而不任)으로서 등용했으면서도 신임하지 못하고 소임을 맡기지 않는 것을 말한다. 이 얼마나 보고 듣고 판단하는, 이른바 시청판(視聽判)의 등차가 얼마나 심하냐하는 것을 경고하고 있다.

선훈(先訓)을 통해서 현실적인 결함을 보전(補塡)하는 영명성(英明性)을 지닌다면 그 자체가 상황관리의 선달자(先達者)가 아닌가싶다.

재단법인 풍석문화재단 김유혁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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