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가양두배의 발호

狐假羊頭輩의 跋扈

(양의 가면을 쓴 여우들의  망동)

여우(狐)는 의심(疑心)이 많은 동물로 알려져 있으며, 양(羊)은 순진한 성격을 지닌 동물로 인식되고 있다. 모든 동물은 맹수이든 아니든 새끼들을 데리고 이동할 때에는 어미가 앞장서고 새끼들은 어미의 뒤를 따르게 한다.

그러나 여우만은 반대로 새끼들을 반드시 앞세워 가게 한다. 새끼들에게 위해(危害)를 가할 일이 생길까 의심하기 때문이다. 여우가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는 여우의 생태 때문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여우는 다른 동물이 숨겨놓은 먹거리를 염탐했다가 밤이 되면 몰래 훔쳐다 먹는 습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가하면 여우는 사람들에 의하여 위선과 기만과 변절의 대명동물(代名動物)로 인용되고 있다. 즉 여우같은 놈이라는 욕설이 그것이다. 따라서 인간관계에 있어서 만약의 경우 지신을 소개할 때 “나는 여우같은 사람”이라고 한다면 어느 누구도 그를 신뢰하려 들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양과 같은 사람”이라고 자신을 소개한다면 십중팔구의 사람들은 그를 믿으려 할 것이다. 왜냐하면 양은 길상(吉祥)의 상징이기 때문이며, 선(善)의 대명동물이기 때문이다. 우선 양자(羊字)가 든 글자를 더듬어보아도 나쁜 의미로 쓰이는 글자가 거의 없다. 즉 상서로울 상(祥)자, 착할 선(善)자, 옳을 의(義)자. 아름다울 미(美)자, 부러워할 선(羨)자, 기를 양(養)자 등이 그것이다.

양은 어미 젓을 빨 때 반드시 무릎을 꿇고 젓을 빤다 하여 옛 분들은 양을 가리켜 어미의 은혜를 고맙게 생각할 줄 아는 동물이라고 했다. 그리고 양은 온순한 동물이라고 사람들은 거의 예외 없이 이야기 한다. 왜냐하면 양은 사람에게 잡히기 전까지는 도망치기도 하지만 일단 잡히면 발끝하나 움직이지 않으며, 엄마 품에 안긴 아기처럼 순하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양을 품에 안으면 따듯한 온기를 느낄 수 있다. 그래서 양을 가리켜 온순하다고 하는 것이다. 이 사실은 겨울철에 몽골 벌판에서 양 새끼를 품에 안아보면 실감할 수 있다. 그리고 양은 죽음을 당할 때 울음소리 한번 내지 않고 안중근 의사의 경우처럼 침묵리에 의연한 모습으로 죽어간다.

양의 그와 같은 생태적인 특성을 인간교육의 훈례(訓例)로 많이 인용한다. 더욱이 양은 어떤 경우에도 반드시 무리 지어 생활한다. 무리군(群)자의 유래가 양의 군집생활의 모습에서 유래하였음을 쉽게 알 수 있거니와, 양은 아무리 큰 무리를 지어 생활해도 파당을 만드는 경우가 절대 없다. 그래서 양의 집단속성(集團屬性)을 일컬어 군이부당(群而不黨)이라고 한다.

그런 양의 사례를 본받자는 뜻에서 장 차관 등 고위관직에 오르는 이에게 축하의 선물을 전할 때 어린 양 두 마리를 선사하는 관례도 있었다. 즉 당파를 조성하지 말고, 붕당정치(朋黨政治)로 나라 망가트리는 일이 없도록 해달라는 당부의 뜻이 담겨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실체를 감춘 여우들이 너무 날뛰는 것 같다. 즉 자신의 정체를 숨기려는 의도에서 양의 가면을 쓰고 나서려는 이가 사회일각에서 준동(蠢動)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일반 대중 차원에서 잘 이해할 수 없는 민족의 주체성을 부르짖으며, 주한미군 철수하라, 맥아더장군 동상 철거하라, 보안법 폐지하라고 외쳐대는데, 역으로 질문해서 주한미군이 대한민국 안보유지에 해악을 끼친 사례가 있는가? 맥아더장군 동상이 서 있다고 해서 우리들의 일상생활에 장애가 되는 일이 있는가? 보안법이 있다고 해서 우리의 법질서유지상 문제 되는 일이 있는가?

만의 하나 문제시해야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북의 집단에 의한 남침전쟁을 적화통일의 성전이라고 보는 북한식 사관(北韓式 史觀)을 지닌 자들이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하려는 그들의 주장이 먹혀들지 않는다는데 있을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은 대한민국이다. 대한민국의 국민은 주한미군의 주둔을 마다할 이유가 없는 것이며 맥아더장군의 인천상륙작전의 대첩을 자유민주주의 수호전사(自由民主守護戰史)에 기리 남겨야할 금자탑이라 여기고 있다.

그리고 사회 일각에서는 종교활동을 빙자하여 호가양두(狐假羊頭)의 광대놀이판 같은 장면을 연출하고 있는 것으로 보도되고 있다. 천안함 폭침도 사실로 믿기 어렵다하고, 연평도 무차별 포격도 문제시할 이유가 없다는 식으로 괴변을 늘어놓고 있으며, 서해안 일대에서 행한 우리의 해상연합훈련이 원천적으로 북한을 자극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임으로 북한의 군사행위는 도리어 정당하다는 뉘앙스를 풍기는 듯한 발언은 과연 종교인의 양식에 입각해서 보았을 때 정당하다도 보아야 할 것인가?

일례를 들어서 가톨릭계의 박모라는 이의 그와 같은 발언과 생각이 교리에 어긋나지 않고 이 나라 민주주의의 회생과 사회정의 구현을 위해서 정당한 것이었다면, 왜 가톨릭계 내부에서 정의사제단을 강력히 배척하는 저항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그 발언 당사자와 그의 동조자 내지 추종자들은 일반 국민에 대해서 자신들의 정당성을 이야기하랴 하기 전에 가톨릭계 신자들에 대한 설득력 있는 답변을 먼저 해야 할 것이다. 만약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자숙과 반성과 사죄와 아울러 사직당국의 수사에 성실히 응해야 할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태극기에 대한 경례를 거부하고 애국가 부르기를 거부하면서도 대한민국 강토에 내리는 이슬과 비와 눈을 맞아가면서 계절풍토를 즐기려는 그들은 일어탁수(一魚濁水)의 존재이면서도 자신이 흙탕물을 일으키는 미꾸라지인 줄도 모르고 날뛰고 있다는 뜻이 된다.

그런 이들이 이른바 종교계를 대표한다고 나서서 연례행사처럼 시국선언이라는 것을 발표하여 참다운 종교인들을 괴롭히고 있다. 일부의 그런 사람들의 경우일수록 자신들의 수도수준(修道水準)을 먼저 짚어볼 줄 아는 내성력(內省力)을 우선 길러야 할 것이며, 동시에 대 국민시국선언을 하기에 앞서서 대 교계자성선언(對敎界自省宣言)을 먼저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각 교계의 존경받는 종교지도자 및 참다운 신도들의 권위와 명예를 훼손하는 일이 없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우려야 할 것이다. 일어탁수(一魚濁水)의 결과는 샘물을 마시고자 오는 사람들의 갈증마자 해소할 길을 막는다. 마찬가지로 오만과 편견에 치우친 일부 종교인들의 부질없는 짓으로 인하여 참다운 복음과 설법을 듣고자하는 이들의 눈과 귀를 막고 마음의 광장까지도 황폐화하는 해악을 끼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고현(古賢)의 말 가운데 외승내불(外僧內佛)이라는 가르침이 있으며. 사신불여사심(事神不如事心)이라는 말이 있다. 외견상으로는 한낱 승려이지만 내심(內心)으로는 부처님이어야 하고, 신을 섬긴다는 것은 마음을 섬기는 것만 같지 못하다는 뜻이다

불심이 없는 승려는 술과 도박을 즐기기 좋아하며, 자신의 마음을 바르게 다스리지 못하고 있는 신부와 목사는 예수님을 섬길 자격이 없다는 뜻이다. 내불(內佛)의 길로 정진하지 아니하고, 예수님 앞에서 거짓을 범하지 않기 위한 사심선행(事心先行)을 하지 않는다면 모두가 호가양두(狐假羊頭)라는 지탄(指彈)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재단법인 풍석문화재단 김유혁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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