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와 논리

眞理와 論理

진리(眞理)는 자연과 더불어 존재하고,

논리(論理)는 인간에 의하여 형성된다.

진리는 어떤 경우에도 인간에 의하여 부정될 수는 없다. 그러나 논리는 인간에 의하여 응용될 뿐이지만 그것이 어떻게 응용되느냐에 따라 선(善)과 악(惡)의 영역으로 대별된다.

때문에 진리(眞理)에 바탕을 둔 논리는 과학이론으로 발전하고, 선리(善理 )에 바탕을 둔 논리는 도덕이론으로 발전된다.

그러나 악의(惡意)에 의한 논리는 위선(僞善)과 위장(僞裝) 및 궤변론(詭辯論)을 낳을 뿐이다.

왜 우리는 악의의 논리를 경계해야 하는가?

악의는, 선리(善理)로 포장된 위선(僞善)을 통하여 국민들을 현혹시키기 때문이며, 다른 하편으로는 위선을 내장(內藏)한 언행을 통하여 동정(同情)과 봉사 등의 형식으로 표현하는 위장(僞裝)은 현실을 호도(糊塗)하기 때문이다.

현혹과 호도의 수법은 가슴 속에 숨겨 둔 목적을 이루기 위한 하나의 조무(造誣)요 사술(詐術)이기 때문에 선량한 국민들은 각자가 처해 있는 처지여하에 따라 쉽게 동조할 수 있다. 동조자를 사회적으로 세력화(勢力化)하고 그 세력화한 집단의 역량을 통하여 진리를 악용하고 선리를 오도함으로서 사회적 미관(美觀)을 훼손하는 경우가 많다.

일직이 공자(孔子)의 인(仁)의 사상논리를 부정하기 위한 당시의 자칭 선각자중의 일부 인사들은 공자에게 묻기를, 자연(自然)이 무엇이요? 그 때 공자는 긴 설명을 하지 않고 들녘에서 뛰 노는 송아지를 가리키면서 저것이 자연이요라고 했다. 그랬더니 또 묻기를, 그렇다면 인간(人間)은 무엇이요? 공자 또 대답하기를, 코뚜레 뀌고 고삐 줄에 매어있는 어미 소를 가리키면서 저것이 인간이요라고 했다. 그 두 마디 듣고 그들은 말없이 물러갔다.

만약 그 들이 과학이란 무엇이요? 하고 물었다면 아마도 공자는 활을 메고 있는 사람을 가리켜서 저것이 과학이요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만약에 동물학대론을 펴는 이들이라면, 소를 부려먹기 위하여 소의 코뚜레를 끼는 일이나, 산짐승을 살상하기 위한 활잡이들을 비난했을 것이다. 만의 하나 그 당시에 그런 논리를 내세웠다면 그것은 분명히 말해서 위선임에 틀림이 없다. 왜냐하면 당시의 우마력(牛馬力)은 노경산업시대에 있어서 거의 필수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살상용 궁시(弓矢)는 인간의 생존을 위협하는 맹수들의 침범을 막기 위한 유일한 방패이었는가 하면, 자연채취경제시대에 있어서는 수렵의 필수용구이었기 때문이다.

송나라시대의 거유(巨儒)인 주자(朱子)라든가 한국 성리학의 대학자인 이율곡선생이 자주 쓰는 말 가운데 시유고금(時有古今)이나 도무고금(道無古今)이라는 말이 있다. 즉 시대개념은 고금의 구별이 있을 수 있지만, 도리라는 것은 고금의 구별이 없다는 뜻이다.

악의에 의한 선리부정(善理否定)의 경향은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하나의 사회적 현상의 일부로 이어져왔던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문제의 소재(所在)가 서로 달랐다는 점이다.

과거시대에는 자신의 지각미흡(知覺未洽)에서도전현상이 제기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고 한다면, 현금에 이르러서는 대중의 몽매함을 이용해서 자신들의 의도하고 있는 바를 충족하기 위한 불건전한 악의(惡意)가 숨겨져 있다는 점이다.

그와 같은 도덕적 타락풍조에 대하여 경각을 주기 위해 일직이 맹자(孟子)는 말하기를, 제집의 닭이나 개가 나가면 그것을 찾으려고 야단법석 떠들면서도, 제 가슴속에서 양심이 사라진 것은 아예 찾으려고도 하지 않는다고 했다 (人有鷄犬放則知求之, 有放其心而不知求之)

그런가하면 신음어(呻吟語)의 저자인 여곤(呂坤)은 세상에서 가장 나쁜 3대악은 다음 3가지라고 말하고 있다.

제1의 악은 언어의 악으로서 거짓말을 꾸며대는 것보다 더 나쁜 것은 없다는 것이요,(言語之惡 莫大於造誣)

제2의 악은 행동의 악으로서 남을 가혹하게 깎아 내리는 것보다 더 나쁜 것은 없다는 것이요. (行事之惡 莫大於苛刻)

제3의 악은 마음의 악으로서 가슴속에서부터 남을 헐뜯고 질투하고 모함하는 것보다 더 나쁜 것은 없다고 했다.(心術之惡 莫大於深險)

선현들의 그러한 경구(警句)는 바로 오늘의 우리를 향해서 꾸짖는 훈계가 아닌가 싶다. 왜냐하면 우리 사회의 연간 갈등비용이 50조원에 달한다고 하니 말이다. 이것도 나쁜 의미의 세계 최고가 아닌가 싶어서 선진시민답지 못하다는 부끄러움을 감추기 어렵다. 모두가 함께 뼈에 새겨 자성할 일이 아닐까 한다.

칭찬은 모두 자기의 몫이고, 과오와 실수는 모두 남의 탓이라고 여기는 그릇된 습벽(習癖)은 반드시 스스로 고쳐가야 할 우선적 자치과제(自治課題)가 아닌가 싶다.

재단법인 풍석문화재단 김유혁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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