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신 불여사심

事神 不如事心

(신을 섬기기에 앞서 마음을 먼저 섬기라)

신을 섬긴다는 것은 절대자를 섬긴다는 것을 의미한다. 절대자는 누구인가? 일반적인 경우 종교에서 이야기하는 하나님, 하느님, 하늘 님 등의 용어로 표현하는 신앙의 대상으로 상징화된 관렴적인 절대자를 말하는 것이다.

그 절대자는 즉 신(神)이다. 신은 최소한 다음 3가지의 상징성을 갖추고 있다고 우리는 믿고 있다.

첫째, 신은 하지 못하는 것이 없다는 무소불능(無所不能)의 존재요.

둘째, 신은 오래 오래 죽지 않고 있는 이른바 영생불멸(永生不滅)의 존재요.

셋째, 신은 인간으로서는 볼 수 없는 불가시적(不可視的) 존재인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신을 신봉하는 인간은 그 3가지를 못 갖추고 있다. 때문에 신 앞에서는 무려(無力)함을 느끼며, 동시에 신에 귀의(歸依)하지 않을 수 없다고 믿게 된다. 그것이 종교상의 귀의논리인 것이다. 그런데 인간이 보지도 못한 신을 대신하여 신의 뜻을 전하는 의식을 행한다. 그것을 유학에서는 강론(講論)이라하고 불교에서는 설법(說法)이라하며, 기독교에서는 설교(說敎)라고 한다.

강론은 경전(經傳)을 바탕으로 하며,

설법은 불경(佛經)을 내용으로 하고,

설교는 성경(聖經)을 기본으로 한다.

경전과 불경과 성경은 거의 예외 없이 선과 악을 구분해서 택선기악(擇善棄惡)할 것을 가르치고 있다. 택선기악의 방법은 사랑을 중심축으로 하여 직행하는 방법으로는 선순환(善循環)의 장려요, 우회적 방법으로는 개과천선(改過遷善)이다.

그럼으로 종교에서는 사람을 버리지 않는다. 사람을 버리지 않는 정신이 곧 유학의 자효정신(慈孝精神)이요. 불교의 자비정신(慈悲精神)이요, 기독교의 박애정신(博愛精神)이다.

자효와 자비와 박애는 사랑을 공통분모로 한다. 그럼으로 모든 인간은 그 3가지 사랑의 테두리 안에서 존재한다. 때문에 그와 같은 종교관에 의한다면 버림 받아야 할 사람은 한 명도 없어야 한다는 논리가 성립된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반드시 그렇지만 않다.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그 이유의 소재는 간단히 밝힐 수 있다.

그것은 양심을 바로 지니기 위한 본질적인 노력 없이 신만을 먼저 섬기려 하기 때문이다.

마음이 정직하지 못하면서 신의 은총만을 갈구하는 기도를 한다면 그것은 이미 기도가 아니다. 처음부터 신을 속이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우매한 사람들을 현혹시켜 신의 은총을 내리게 해준다는 말 재주를 내세워 사람을 기만한다면 그것도 이미 기도가 아니다. 사기행각일 뿐이다.

신음어(呻吟語)에 이런 말이 있다.

인정은 베풀지 않으면서 말만을 포장지의 문양처럼 늘어놓는 것과 성실성은 보이지 않으면서 위선적인 표정만을 짓는 것은 믿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情不足而文之以言. 誠不足而文之以貌)

우리는 4월 16일을 “재난의 날”로 설정하자고 대통령 담화문에서 언급할 만큼 세월호의 침몰사고를 마음 아프게 여기고 있다. 담화를 발표하면서 울먹이시는 대통령과 함께 울었다는 사람들이 경향 각지에 아주 많았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명실상부하게 재난에 강한 우리 민족이었다면, 최소한 다음과 같은 표정관리는 할 수 있었어야 했을 것이다.

첫째는 사건발생 초기부터 세월호 관련 단체에서는 누구보다도 성의 있는 자세로서 영령과 유가족을 비롯하여 애도에 잠긴 국민을 위한 조석 기도라도 했어야 했다.

둘째는 유가족 측에서는 마음의 아픔을 가누기 어려웠겠지만 실종자 인양을 위해 희생한 잠수사의 명복을 빌고 아울러 입원해서 신음

중인 그들의 고통을 위로하는 온정표현의 모습을 개별적으로 또는 단체의 형태로 보여주었더라면 참으로 좋았을 것이다. 우리 모두의 위상을 동시에 높여갈 수 있었을 것을 하는 아쉬움을 느꼈다.

셋째는 침묵을 지키며 자중해야할 사람들이 도리어 나서서 개구증환자(開口症患者)처럼 무불간여하려는 추태는 마땅히 없어야 헸다. 더욱 자성자숙(自省自肅)하는 모습으로 사태수습에 일조라도 할 수 있는 길이 무엇인가를 찾아보는 봉사역군들의 기상을 배워갔으면 한다.

우리 국민을 일컬어 재난에 강한 민족이라 한다. 주변 열강 틈에 끼어 역사적으로 많은 시련을 겪어왔다. 멸족위협으로 부터 벗어나기 어려운 상황에 놓이곤 했다. 그러나 우리는 재기의 모습으로 우리 나름의 문화적 정통성을 이어갈 수 있었다. 특히 외환에 의한 시련을 당했을 때마다 승리의 개념으로 마무리 지었던 사례는 거의 없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한 번도 젔다는 말을 쓰지 아니한다. 분명히 승리하지 못했으면서도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라는 말을 잘 써왔다.

참으로 대단한 민족임을 의미하는 말이 아닐

수 없다. 외환에 의하여 크고 작은 도전을 받기도 했지만 젔다는 생각을 한 적은 거의 없다. 거기에는 상당한 이유가 있다.

우리에게 도전하여 이겼다는 다른 나라인 상대방은 승리의 조건을 내세워 군마(軍馬), 양곡. 호피(虎皮). 비단과 같은 물량적인 것들을 요구해오곤 했다. 우리로서는 그들에 대항할만한 힘이 약했기 때문에 그들 요구에 응하면서도 마음의 굴복은 하지 안 했다.

왜냐하면 우리로서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로서는 반드시 지켜야 할 전통문화적인 가치를 내어 준 일이 없으며 또한 그것을 패배의 조건으로 흥정을 했었던 일이 없기 때문이다.

군마와 양곡 등은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냐면 또 생산되는 것이기 때문에 정체성이라는 문화적 가치와는 비교가 될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물리적인 패배는 당했으면서도 우리가 반드시 내어주어서는 안 될 문화적 가치는 잃지 안 했기 때문에 지고서도 이겼다는 긍지를 지닐 수 있었던 것이다.

참으로 묘미 있는 말이다.

선현들의 전언(傳言) 가운데, “이기는 법보다는 지는 법을 먼저 배우라”는 말을 다시 되 뇌이게 된다. 아귀다툼하면서 무슨 일에 있어서나 이기기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이들에게는 마음을 다스리는 양약(良藥)이 되지 않을 까 한다.

재단법인 풍석문화재단 김유혁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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