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지와 득지

知止와 得止

대학에서 말하기를 대학의 도는 지선(至善)이라는 개념이 바로 서는 차원에서 언행의 입점(立点)을 찾아야 한다고 했다(大學之道 在止於至善). 대학은 대인지학(大人之學)이라 하거니와 이는 어른스러워지기 위해서 배우는 것이며, 아울러 어른스럽게 살아가기 위해서 익혀야하는 학문이라는 뜻이다.

여기에서는 편의상 대학의 3가지 기본강령 중에서 지(止)에 관해서 살펴보기로 한다. 지(止)라고 하는 것은 어느 시점(時間)과 어느 지점(空間)과 어느 동점(動點:行方)에서 멈추어야 하는가를 알아야 한다.

신음어(呻吟語)에서 보면, 언어지악(言語之惡)은 막대어조무(莫大於造誣)라고 하였거니와 말을 할 때 거짓말을 하거나 꾸민 말을 앞세우거나 유언비어 등을 퍼뜨려서 사람들로 하여금 소란을 피우게 한다면, 이는

첫째, 말의 시의성(時宜性)을 잃은 것이며,

둘째는 입지점(立地点)을 모르고 있다는 것이 된다.

그리고 말은 의사의 전달기능을 하는 것인데, 모함을 통해서 사람들을 혼란과 소동의 분위기로 몰고 간다면 이는 분명히 말의 동점(動點)을 잃은 것이다.

 다시 말하면 말은 마땅히 해야 할 때가 있는 것이며 장소를 가려서 해야 하고, 상대방을 고려해서 해야 한다는 뜻이다.

오이씨디 국가 중에서 우리나라처럼 사회적 갈등비용(年間약50조원)을 부담하고 있는 나라도 드물다고 하거니와 이는 각계 지도급 인사 및 말 재주를 미천 삼아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무모하고 무책임하게 언동하고 있었느냐하는 것을 단적으로 반증하는 것이라고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과 다른 말을 퍼뜨려 사회분위기를 혼탁하게 만들고 자신의 생각을 마치 사회적 여론인양 호도하며 그리고 근거 확인 없이 먼저 전하는 것이 경쟁에서 이기는 것이라고 잘못된 생각에서 선보경쟁논리(先報競爭論理)에 사로잡힌 정오판단력(正誤判斷能力)조차 없는 일부 매체의 망동은 사회적 갈등조장이라는 악순환만을 거듭하게 할 뿐이다. 일어탁수라는 말을 흔히 쓰거니와 한 사람의 지지부지(知止不知)라는 망언 방행(妄言放行)이 탁수어(濁水魚) 이상의 해악을 끼치는 경우가 많다.

물은 자정기능을 지니기 때문에 탁수를 다시 청정하게 할 수 있지만 조무(造誣)의 악영향은 온 사회풍토를 혼탁의 도가니로 몰게 될 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심지(心地)마저 모새(茅塞)하게 만드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이는 탁수가 아니라 탁류(濁流)가 된다는 위험을 안고 있다. 때문에 사회각계의 지도급 인사들은, 그리고 식견이 있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의 경우일수록 우리 사회가 지니는 선(善)의 풍토적 맥락에서 계왕개래(繼往開來)하는 전통적 공동선의 가치를 공부해야 한다는 요구가 절실하다.

대학에서 이르기를 지지(知止)가 무엇인지 알아야 득지(得知)할 수 있고, 최선이 무엇이라는 지선(至善)을 체득할 수 있다고 하였다. 지(止)라는 것은 시(是)와 최선과 극리(極理)가 함께 머무는 종합적인 개념의 표현이다.

논어에서도 이르기를, 군자(식견이 있는 사람)는 무소불위기극(無所不爲其極)이라 했다. 무슨 일을 하던 간에 최선을 다하지 않을 때가 없다는 뜻이다. 역대의 거유(巨儒)들도 주석을 달아서 전하기를, 지(止)라는 것은 마땅히 머물러야 할 곳에서 표현되는 최선의 소재(所在)라고 하였다(止者, 所當止之地, 卽 至善之所在也), 따라서 지를 알게 되면 마음이 가야할 방향을 알게 되기 때문에 소란을 피우지 않는다고 하였다. (知止則 志有定向而靜).

정(靜)은 안정과 사려와 터득력의 종합적인 표현이다. 때문에 정은 심불망동(心不妄動)을 뜻하며, 안(安)은 소처이안(所處而安)을 의미하고, 여(慮)는 처사정상(處事精祥)을 말하며, 득(得)은 득기소지(得其所止)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지지(知止)와 득지(得止)의 차이점을 알 수 있다.

선현들의 예시에 따른다면,

지지는 여사자지어적(如射者之於的)이라 하였고, 득지는 시이중기적(是已中其的)이라 하였다. 다시 말하면, 지지라는 것은 활을 쏘기 위하여 관역을 겨냥하는 자세와 같고, 득지라는 것은 이미 그 관역을 적중하였을 때와 같은 그런 몸 가짐이라 하였다. 즉 화살을 쏘아야할 관역을 바르게 겨냥할 줄 알고, 그 겨냥한 관역을 적중하는 최적의 방법을 터득하라는 것이다.

우리나라 젊은 궁사들이 세계적인 명성을 드높이고 있는 광경을 보고, 박수와 환호를 보내는 이들은 많지만 순수한 마음가짐의 젊은 궁사들처럼 적중력을 발휘하는 원리적 접근방식을 본받아 언동의 격률을 가다듬어가려는 사람들은 많지 않은 것 같다.

궁사들의 세계에서는 더 잘 쏘기 위한 길을 모색하는데 비하여, 천민기업인(賤民企業人)과 속인집단(俗人集團) 및 속유급(俗儒級) 식자층에서는 비싼 활과 비싼 골프채만을 욕심 부릴지언정, 관중능력(貫中能力)의 체득 방안은 거의 고려하지 않는 것 같다.

양궁의 개념과 양궁소유의 참 된 주인이 누구여야 하는지 먼저 공부할 때이며, 양궁이 궁갑(弓匣)에서 잠자지 않게 해야 한다. 더욱이 순금 골프채가 골프백 속애서 녹슬지 않아야 한다는 공명사회건설의 대도(大道)는 지지(知止)와 득지(得止)의 논리에서 배우고 깨달아야 할 것이다.

재단법인 풍석문화재단 김유혁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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