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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에 넘쳐나는 '서유거'에 대해

Q&A
작성자
탁PD
작성일
2022-06-06 17:28
조회
278
아래는 제가 메일로 질의드렸던 내용입니다. 답이 없으셔서 여기에 옮깁니다. ^^

안녕하세요. 저는 현재 '우리술 익스프레스'(EBS Books)라는 책의 출간을 앞두고 있는 탁재형PD라고 합니다. 이번 글을 쓰면서 풍석문화재단에서 펴낸 '조선셰프 서유구의 술 이야기' 책의 도움도 정말 많이 받았습니다. 재단 여러분의 노고에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제가 메일을 보내게 된 것은, 이번에 제 책에서 풍석 선생님과 관련된 언급을 하면서 제 생각이 맞는 것인지 여쭙기 위해서입니다.



먼저 제 글의 한 단락을 여기에 옮기는 것이 제 질문의 취지를 알리기에 제일 좋은 방법일 듯 합니다. 제 책에서 저는 이렇게 쓴 바 있습니다.

약주가 청주를 뜻하는 의미로 쓰였다는 또 다른 근거는, <임원경제지>에 실려 있는 '약산춘 빚는 법'(藥山春方)이라는 이름의 주방문(酒方文 술 빚는 레시피)이다. 이 글에서는 술의 유래를 설명하면서, 인조 대에 청주를 잘 빚던 충숙공 서성(徐渻)이라는 사람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책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약산춘은 곧 충숙공 서성이 빚은 술이다. 공의 집이 약현(藥峴)에 있었기 때문에 약산춘이라고 이름지어졌다." (藥山春方 卽徐忠肅公消一造. 公家于藥峴, 故名藥山春.)

서성은 <임원경제지>를 쓴 서유구(徐有榘 1764-1845)의 7대조 할아버지다. 서성의 청주가 워낙 맛이 좋았기에, 그가 빚은 술을 집이 있는 '약현'(藥峴_현재의 서울시 중구 중림동)의 지명을 따 '약산춘'이라 불렀다는 것이다. 약산춘은 이양주 방식으로 빚는 청주다. 멥쌀로 백설기를 쪄 밑술을 안치고, 한달 보름 정도 지나 다시 멥쌀로 고두밥을 해 덧술한다. 고급주에 주로 붙는 '춘'(春)이라는 글자가 이름 중에 있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 맛은 깔끔하고 정갈하다. 서울의 상류층 사대부들이 좋아했음직한 형태의 술이다. 하지만 '약산춘 빚는 법'에 나와 있는 내용은 딱 여기까지다. 이 약산춘이 곧 약주의 유래가 되었다는 말은 어디에도 없다. 직접적으로 이 말을 하고 있는 문헌은 이로부터 100년 넘게 지난 일제시대에, 일본인들에 의해 일어로 쓰여진 <조선주조사>(朝鮮酒造史 1935)다. 책은 제 1장의 연혁 부분에서, '조선주의 남상(濫觴 사물의 기원이나 발단을 의미하는 옛말)'을 거론하며 약주 명칭의 유래에 대해 이렇게 쓰고 있다.

"청주가 약주로 불리게 된 까닭에는 청주가 약용으로서 사용됐다는 뜻이 아니라, 앞서 기술한 '서유거'(徐有渠)가 매우 우수한 청주를 만들었다. 이에 서씨의 아호를 약봉(藥峰)이라고 불렀고, 거주지는 약현(藥峴)이었으니, '약봉이 만든 술', '약현에서 만들어진 술'이란 뜻에서 약주라고 불렸다 하며 오늘날 약주가 청주의 대표명으로 되어 일반적으로 불리우게 되었다는 것이다."

일단 <임원경제지>에 나오는 표현들이 마음대로 윤색되어 있다. '약산춘'이라는 술이름을 건너뛰고, '약현에서 만든 술이어서 약산춘'이라는 내용이 '약현에서 만들어서 약주'로 비약하고 있다. 또한 사실관계도 부정확하다. '충숙공 서성'을 '서유거'(徐有渠 - 마지막 글자가 渠(개천 거))라는 정체불명의 이름으로 잘못 써 놓았고, 이 '서유거'는 다시 <임원경제지>를 쓴 '서유구'(徐有榘 - 마지막 글자가 榘(법도 구))의 오기(誤記)일 가능성이 높다. 조선 문헌에 대한 고증이 부족했던 탓에, 서유구의 7대조 할아버지가 만든 술을 서유구가 만든 것이라고 둔갑시키고 그나마도 이름에 오타를 내 놓은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한 번 책에, 그것도 조선총독부 산하 기관이 펴낸 꽤나 권위있는 역사서에 실린 오류는 더 이상의 검증 없이 계속해서 퍼져 나갔다. <조선주조사>가 발간된지 2년이 지난 1937년 11월 6일, <동아일보>는 기사를 통해 '경성에서 청주를 약주라고 통칭'하고 있는 것의 유래를 '광해조 시대의 '서유거'라는 분이' 빚은 '약봉주, 약현주'로 설명하고 있다. 이렇게 부르다가 '필경은 약주라고 약칭'했다는 것이다. 누가 봐도 <조선주조사>의 잘못된 팩트를 그대로 가져다 쓴 티가 난다. 기사에는 원문에 없던 '약봉주'와 '약현주'가 슬그머니 끼어들었다. 백 번 양보해 '서유거'를 '서유구'라고 이해해 주려 해도, 그는 영조 대부터 헌종 대에 걸쳐 살았던 사람이다. 잘못된 원문에 살을 붙이다 보니,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알 수 없을 정도의 총체적 난국이 되어 버렸다. 심지어 이 근본없는 '서유거'라는 인물에 대한 이야기는 아직도 흘러다니는 말의 원전을 찾아보기 귀찮아 하는 사람들에 의해 계속 재생산되며 인터넷을 떠돌고 있는 실정이다. (한 번 '서유거'로 검색을 해보시라. 깜짝 놀랄 것이다. 블로그 포스팅과 신문기사를 가리지 않고 아직도 '서유거'는 넘쳐난다.)


이렇게 쓰고 나서, 혹시나 각종 기사와 논문 등에서 '서유거'라는 표현이 반복되는 이유에 대해 풍석문화재단에서 따로 연구해서 알고 계신 부분이 있으신지, 혹여 제가 배움이 짧아 '개천 거'자와 '법도 구'자가 서로 호환해서 쓸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인지 걱정되어 한 번 확인을 요청드리게 되었습니다. 제가 글 쓰면서 조사한 바로는 이 '서유거'가 처음 등장하는 것은 1935년에 나온 <조선주조사>이며 이후에 많은 기사와 글, 책 등이 확인작업 없이 이를 전재하였던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알게 되고 고마움을 느껴야 할 풍석 선생의 이름이 이런 식으로 부정확하게 돌아다니는 것에 대해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는 마음입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짧게라도 제 의문에 대해 회신을 주신다면 너무나 감사하겠습니다. 좋은 주말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