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지사항

풍석 서유구 전기 출간

작성자
풍석
작성일
2014-12-01 11:55
조회
4529

풍석 서유구 전기 출간

4월부터 진행해 온 풍석 서유구 전기가 책으로 나왔습니다.

서유구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인물입니다. 전기를 쓰기 전에는 물론 저도 아예 몰랐던 사람입니다. 고등학교 교과서는 1줄 정도로" [임원경제지]를 쓴 실학자"라고 나온다더군요...

서유구는 영 정조 시절에서 순조 헌종으로 이어지는 시기의 인물입니다. 이 시기는 조선 망국으로 이어진 때로서 혁명을 꿈꾸었던 홍경래, 경세유표와 목민심서 등으로 통치 제도와 운영의 개혁을 목표로 한 정약용, 순조 초기 정순왕후의 대리청정 속에서 권력을 장악했던 노론벽파에 맞서 소장파 중심의 권력을 세웠으나 끝내는 안동 김씨 중심의 부패하고 타락한 세도권력을 낳은 김조순이 있었습니다.
홍경래, 정약용, 김조순은 방향은 달랐지만, 모두가 어떻게 통치 제도와 운영을 유지하거나 바꿀 것인가를 중심으로 고민했던 사람들입니다.

서유구는 반대로 하부구조...즉 어떻게 조선의 농업생산력을 높이고 전반적인 생활문화를높여 경제와 문화 전체를 업그레이드할 것인가?...그 것에 의해서만 통치의 안정성이 유지될 수 있다고 본 사람입니다.

서유구는 어린 시절 정조의 스승이자 북학파의 비조로 알려진 조부 서명응의 체계적인 지도로 학문의 틀을 세우고, 박지원/박제가/이덕무 등 북학파를 종유하며 개혁적 사상을 키웠으며, 정조에 의해 발탁된 후로는 정조와 함께 조선 농업 현실의 개혁을 꿈꾸었습니다.
정조가 사망한 후 노론 벽파와 김조순 간의 갈등이 심해지면서, 조정에서 배제되어 17년간에 걸쳐 직접 농사를 지으면서 [임원경제지] 편찬을 시도하였고..

김조순 정권은 순조19(1819)년 정국의 안정화를 위해 삼정의 문란을 해소하기 위해 양전 시행령을 내립니다. 이 때 서유구는 농사를 짓던 신분으로 [의상경계책]을 저술하여 조선의 토지제도, 조세제도, 둔전시행 등에 대한 종합적인 조선경제제도의 개혁안을 만듭니다. 그러나 이 안은 조정에서 받아들여지지 않고...서유구는 유화정국 속에서 다시 벼슬에 나갑니다.

순조 시절에는 효명세자와 함께 정국의 개혁을 꿈꾸기도 하였고, 효명세자가 죽은 후에는 전라관찰사와 수원 유수 등 지방직을 역임하면서 규휼과 농업생산력에 전념하였습니다. 이 기간 관찰사로서의 업무를 각각 [완영일기]와 [화영일록]으로 남겼습니다. 조선 시대 관찰사 급은 약 4천여명인데...그 중 서유구처럼 업무일기를 남긴 사람은 서유구 외에는 2사람 정도가 더 있습니다.

서유구는 76세의 나이로 벼슬에서 물러나 지금의 번동 지역에 실험 농장을 만들어 새로운 품종과 농법 실험,...훗날 개화파로 이어지는 박규수 등 후학들에 대한 지도를 하면서 [임원경제지]의 편찬을 계속합니다.

결국 30여년에 걸친 작업 끝에 당대 동양의 실용지서 893권을 참조하여 총 16개 분야 100여권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의 동양실용생활백과를 편찬하였습니다.
흔히 조선후기 실학의 집대성자로 정약용을 꼽지만...제가 전기를 쓰면서 조사한 바로는 정약용의 [여유당 전서]는 '주자학의 복원'과 '각종 제도의 개혁'및 통치 기구인 '관료 체제의 안정'을 목표로 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그 취지와 목표 내용은 모두 비할바 없이 훌륭하지만, 실학의 집대성은 정확한 표현은 아닙니다. 조선후기 실학의 집대성은 서유구의 [임원경제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서유구는 통치학의 일환으로 주자학과 선을 긋고, 조선에서는 일찍이 없었던, 아니 세계사적으로도 유례가 없는 전혀 새로운 학문체계를 세웠습니다. 주자학이 통치를 목적으로 통치의 원리와 방법론을 다룬 사대부의 학문이었다면, [임원경제지]는 일상의 개선을 목적으로 생산과 생활전반을 다룬 백성의 학문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서유구의 업적도 대단하지만, 그보다 더욱더 감동스러운 것은 숱한 시련과 고난 속에서 삶을 대하는 그의 태도였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직접 책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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