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석은 누구인가?

풍석 서유구(楓石 徐有榘, 1764~1845) 선생은 1764(영조 40)년 11월 10일 아버지 서호수와 어머니 한산 이씨 사이에서 둘째로 태어나,  1845(헌종 11)년 향년 82세 되던 해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서유구 선생의 삶은 조선의 르네상스라고까지 평가 받을 정도로 정점에 달했던 영·정조 시절에서 몰락의 길로 접어들기 시작했던 순조, 헌종 대에 이르기까지 오직 농업개혁을 통한 생산력 증대와 생활문화의 제도화 표준화를 통한 민생의 개선에 바쳐졌습니다.

서유구 선생은 또한 조부이신 보만재 서명응으로부터 시작되어 부친 서호수로 이어져 온 실용지학의 집대성이라는 가학의 전통을 계승하는 한편, 북학파와의 교류를 통해 체득한 이용후생의 실용정신을 바탕으로 평생에 걸쳐 [임원경제지]라는 동양 최대의 실용백과사전을 편찬하여 우리 시대에 남겨놓았습니다.

서유구 선생의 집안은 조선 최대의 명문가였음에도 민생과 실용을 기반으로 하여 생활에서 검박함을 추구하였습니다. 서유구 선생이 소년과 청년 시절 교류하였던 사람들은 탄소 유금, 연암 박지원, 초정 박제가, 이덕무 등 훗날 북학파로 알려진 개혁 사상가들이었습니다.

과거에 급제한 후에는 정조의 핵심 측근으로 정조와 함께 조선 개혁의 꿈을 함께 하기도 하였습니다. 서른 넷 젊은 나이에 정조에 의해 전라도 순창군수로 임명되면서, 당시 백성의 고단한 현실을 온몸으로 깨닫고 본격적으로 조선 농업 현실을 생산력과 제도의 양 측면에서 혁신시킬 방도를 연구하기 시작합니다.

정조가 갑자기 사망하고, 순조 치세 아래에서 김조순 세도정권이 시작되면서 벼슬을 버리고 지금의 파주 지역으로 들어가 몸소 농사를 짓고 목축을 하면서 생활인이자 생산자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합니다.

효명세자의 대리청정이 시작될 무렵, 17년 간에 걸친 야인 생활을 마치고 다시 정계에 복귀하여 사헌부 대사헌 등을 역임하면서 효명세자의 개혁정책에 힘을 보탭니다.  효명세자가 갑자기 서거하면서 조정은 또 다시 안동김씨와 풍영조씨의 세도정권이 힘을 얻게 되고, 서유구 선생은 이후 전라관찰사, 수원유수 등 지방 관찰사 직을 지내며 규휼과 조세제도의 개혁 등 민생 개선에 힘을 쏟는 한편, 농지 개간과 수리 제도의 개선 등 농업 생산력 증대에 집중합니다.

은퇴한 후 마지막까지 농업 생산력의 증대를 위한 시험농장의 운영, [임원경제지] 편찬, 훗날 개화파로 이어지는 박규수, 김영작 등 젊은 후학들의 지도 등에 혼신의 힘을 쏟다가 이 세상을 떠납니다.

문헌에는 시봉하던 시사가 연주하는 거문고 소리를 들으며 운명하였다고 합니다.


서유구는 숙종·영조·정조 대 저명한 관료가 많이 배출된 경화세족(京華世族)의 후예로, 이조판서를 지낸 서호수(徐浩修, 1736-1799)와 한산(韓山) 이씨(1736-1813)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1764, 영조 40).

중시조는 선조대의 명신 약봉藥峰 서성(徐渻, 1558-1631)으로, 약산춘이라는 명주가 이때에 전해졌다고 풍석은 전한다. 약주藥酒라는 말이 그에게서 유래했다는 말도 있다. 서성의 넷째 아들 서경주(徐景霌, 1579-1643)는 선조의 부마였다. 이로부터 2대 아래는, 풍석의 고조 서문유(徐文裕, 1651-1707)로 예조판서를, 증조 서종옥(徐宗玉, 1688-1745)은 이조판서를 역임했다.

조부는 규장각 설립을 주도한 서명응(徐命膺, 1716-1787)이다. 서유구는 어려서 할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할아버지 서명응은 영·정조 대의 중요한 학자 관료였다. 주역 등 역학에 독특한 견해를 가지고 있으며, 천문·지리·농업·언어 등 다양한 방면에 저술을 남겼다. 특히 그의 <<보만재총서保晩齋叢書>>는 총 60책으로 정조(正祖, 1752-1800)로부터 “조선 400년 동안에 이런 거편(鉅篇)은 없었다”는 최고의 평가를 받기도 했다. ‘보만재’도 바로 정조가 친히 하사한 호다. 풍석은 어린 시절 주로 할아버지 임지에 따라 다니며 글을 배웠고, 따라서 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보만재총서>> 중 『위사』를 편술하기도 했고, 22세에는 농학 저술인 『본사本史』의 일부를 조부의 명을 받아 보충저술을 하기도 했다. 정치가로서, 학자로서 조선 최고의  경지에 오른 70세의 보만재가 손자에게 자신의 저술의 일부를 맡겼다는 사실만으로도, 단지 할아버지와 손자 간의 정뿐만 아니라, 풍석의 학문적 수준을 짐작할 수 있다.

풍석에게 부친 서호수의 영향이 거의 보이지는 않지만, 고위 관료이면서 유학(철학)이나 경세학(정치학)이 아닌 분야에 특이한 취향과 전문성을 보유했다는 점은 역시 할아버지 뿐 아니라 아버지를 닮았기도 했다.

아낙네에게 필요한 가정백과사전인 『규합총서閨閤叢書』의 저자인 빙허각(憑虛閣) 이씨는 서유구의 하나 뿐인 형수다. 빙허각 이씨의 남편은 서유본(徐有本, 1762-1822). 박지원에게서 동생 서유구와 함께 문장 수업을 받기도 했던 이다.

서유구의 작은할아버지는 정조의 일등공신으로 정조 재위 초기에 삼정승을 거친 서명선(徐命善, 1728~1791)이다.

작은아버지이자 서유구의 스승이기도 한 서형수도 과거 급제자로, 규장각 편찬사업에 중요한 역할을 했고 순조 초기 옥사에 연루되어 18년 간 귀양살이를 하기 전에는 경기관찰사를 역임했다. 풍석이 어렸을 때 가르침을 많이 받았고, 성인이 되어서는 학문적 벗이기도 했다.


서유구는 젊은 시절 글쓰기 훈련을 많이 했는데, 18세부터 쓴 글쓰기 결과물을 25세(1788)에 『풍석고협집楓石鼓篋集』으로 엮었다. 이 문집은 당대 명망 있는 문사인 성대중(成大中, 1732-1812), 이의준, 이덕무(李德懋, 1741-1793) 세 선배에게서 글마다 비평문을 받기도 했다. 한문학자 강명관의 평에 따르면 20대 청년의 글이라 믿기 어려울 정도로 원숙한 필치로 썼다.

1790년에 정조가 친히 참석한 유생들의 시험에서 최고점(純通, 순통)을 받아 과거에 곧장 응시하라는 명을 받는다. 이를 직부전시(直赴殿試)라 하는데, 직부전시를 명 받았다면 급제는 확정적이다. 이렇게 치른 서유구의 증광시(增廣試, 경사가 있을 때 치르는 과거) 성적은 46명 중 24위(병과 14위)로, 중간 정도의 순위를 보여주었다.

서유구는 과거에 급제한 해(1790)에 규장각 초계문신抄啓文臣으로 발탁되었다.


이제 서유구의 정통 ‘경학經學’ 실력을 가늠할 수 있는 사례를 이야기하려 한다. 정조는 집권 초반기부터 규장각 문신, 경연관과 초계문신을 중심으로 문답식의 학술 연구인 경사강의經史講義를 실시했다. 16년 간(1781~1796) 이어진 경사강의 중에서 서유구는 『시』에 대한 경사강의에 참여했다. 총 4회에 걸쳐 시행되었고 정조의 질문 질문 한 개에는 반드시 한 명의 답변만 제시되어 있다. 정조가 질문지를 초계문신들에게 내리면 일정 기간 안에 답을 써서 제출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얼핏 보기에는 경연처럼 한 공간에 모여 문답이 이루어진 것으로 착각할 수 있으나, 서면 질의응답 식으로 진행되었다. 규장각 20년 경사강의에서 가장 규모가 큰 시험이었다. 시경에 관해서만 590문제를 국왕이 손수 출제했다고 상상해보라.

이 시험에서 풍석은 독보적인 실력을 보였다. 590개 문항 중 풍석의 답변은 181개(31%), 다산의 답변은 117개(20%)가 채택되었다. 서유구는 이때의 일을 전혀 거론하지 않았다. 정약용이 이때를 인생의 가장 큰 광영의 순간으로 기억하는 태도와는 사뭇 다르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여러 경사강의를 정조의 명에 의해 정리하는 작업에 참여하기도 했다. 『주역강의』 1권(총 5권), 『상서강의』 4권(총 8권), 『대학강의』 1권(총 3권), 『논어강의』 1권(총 5권), 『맹자강의』 1권(총 4권), 『좌전강의』 1권(총 1권)은 모두 서유구가 편찬한 책들이었다.


서유구는 경사강의를 편찬함과 동시에 또한 규장각에서 정조가 추진한 각종 편찬사업에 중추적인 역할을 하기도 했다. 서유구를 비롯한 달성 서씨 일족은 당색으로는 소론少論 계열이지만, 당대 교유했던 인물들을 보면 노론의 핵심 인물이 많다. 정조는 29년 간 총151종 3,960권을 편찬했다. 이 중 정조가 직접 편찬을 주도한 어정서御定書는 87종 2,459권이고, 정조의 명령으로 신하들이 편찬한 명찬서命撰書는 64종 1,501권이다. 이 중 1772-1800까지 모두 약 26종 324권(일성록, 일득록 제외)(서종으로는 17.2%, 권 수로는 8.2% 차지)이 서유구 집안의 5인의 손을 거쳤다. 서명응은 6종, 서명선은 1종, 서호수는 5종, 서형수는 7종, 서유구는 11종을 편찬했다.

서유구는 이렇듯 경서에 뛰어난 견해를 지니면서, 규장각 대교로서 그리고 초계문신으로서 규장각의 편찬사업을 비롯한 학술활동에만 7년 여 동안 전념했다. 그는 규장각에서의 편찬 경험을 통해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요소 외에도 책을 체계적으로 편찬하는 방법이나, 내용 발췌 방법 등에 대한 자신만의 노하우를 축적할 수 있었을 것이다.


1806년 1월 15일 1차 사환기가 마감된다. 서유구가 홍문관 부제학에 제수될 당시 1806년 1월은 강한 숙청 바람이 불기 시작하던 때였다. ‘김달순(金達淳, 1760-1806) 옥사(병인경화, 丙寅更化)’가 그것이다. 파주 장단으로 귀농하게 된 때가 그의 나이 43세였다. 18년간 할머니, 어머니를 모시고 자식을 건사하며 집안을 책임져야 했다.

풍석은 18년 간 여러 번 주거지를 옮겨가며 생활고에 빠져있었다. 다리 걷어 붙이고 논밭둑길을 헤쳐가며 농사를 지었고, 임진강 하류에서 물고기를 잡으면서 생계를 유지해야 했다. 몸으로 뛰며 독서와 저술 활동은 멈추지 않았다. 서유구는 이 어려운 시기에 『임원경제지』의 목차를 편성하고 『행포지』·『난호어목지』·『경솔지』·『옹치잡지』·『금화경독기』를 쓰고 아들 서우보(徐宇輔, 1795-1827)가 농사짓기와 물고기잡이는 물론 부친의 원고 정리 및 교열을 맡았다.


작은아버지 서형수는 전라도로 유배되어 추자도에서 오랜 동안 생활하다 내륙인 임피현으로 이배移配하게 된다. 죄를 감면하는 조치다. 그리고 얼마 뒤 조정에서는 기다렸다는 듯이 즉각 서유구를 다시 정계로 불러들인다. 돈녕부(敦寧府, 종친부에 속하지 않는 종친과 외척에 관한 사무를 보던 곳) 도정(都正, 정3품 당상관)이 복직 후 첫 보임이었다. 그리고 1달 여 뒤에 외진 고을 회양(淮陽, 강원도 북동부)의 사또가 되었다. 환갑을 1년 앞 둔 나이였다. 서형수는 이로부터 1년 뒤 세상을 떠나자, 순조는 그를 도류안(徒流案, 죄인 명부)에서 지우도록 했다.

서유구는 이 때부터 16년 동안 고위직을 두루 거치게 된다. 정승의 반열에는 오르지 못했다. 그리고 대제학이라는 학자로서의 최고 명예직을 차지하지도 못했다. 16년간의 제2 사환기에 풍석은 농업 전문서 『행포지』를 1차 완료했고(1825), 구황을 타개하기 위해 고구마 재배법을 기록한 『종저보』를 편찬·보급했으며(1834), 호조판서 재임 시에는 자신의 농업에 관한 소신이던 농법인 견종법(畎種法, 골에 작물을 재배하는 법)을 부활시키려고 했다는 기록이 있다. 지방관으로 부임하자마자 그 지방의 특성을 간파한 뒤 농민에게 소 117마리를 보급하여 소밭갈이 보급을 첫 번째의 농정으로 삼았다. 이후 전라도 관찰사, 수원부 유수 등 광역을 관장하는 고위 지방관으로 재직할 때에는 소 도살을 엄금하고 소 밭갈이를 최대한 활용하도록 농민에게 권장했다. 당시 우금牛禁이라는 소 도살 금지법이 있었는데도 법을 위반하여 고기를 저자에 파는 일이 빈번했다. 소 도살은 농사의 황폐화와 직결됨을 누구보다도 절절하게 몸으로 아는 풍석으로서는 이 같은 현상을 좌시할 수 없었을 것이다. 또한 전라도 관찰사로 재직할 때는 ‘학음鶴飮’이라는 수차를 제작해 관할 군현에 배포했고, 전라도 화순 유생 규남圭南 하백원(河百源, 1781-1845)이 설계한 자동양수기 자승차(自升車)를 제작하려고 하백원에게 세 차례나 간곡한 서신을 띄우기도 했다.


조선후기에 부의 편중과 함께 지식과 정보의 편중도 심화되었다. 당시 지식과 정보 수집의 핵심적인 한 축이 서유구 집안이었다는 사실이다. 서유구는 장서가로 다섯손가락에 꼽힐 정도였다. 심상규(沈象奎, 1766-1838)는 4만 여 권을, 조병구(趙秉龜, 1801-1845)와 이조판서를 역임한 윤치정(尹致定, 1800-1865)은 3-4만 권을, 좌의정까지 오른 이경억(李慶億, 1620~1673)은 1만 권을, 서유구는 8천 권을 소장하고 있었다고 한다. 한편으로는 풍석은 책 수집에 누구보다도 전문적 소양을 지니기도 했다. 어려서부터 집에 책이 워낙 많았던 집이라 책 모으는 데는 일가견이 있던 풍석이었다.

여러 정보를 조직적, 체계으로 정리하는 편찬사업에 다년 간 종사했던 경험도 자신의 저술 경향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여기에 서유구의 가학(家學)이 가미되어, 경학이나 경세학보다는 실제 활용 가능한 ‘실용학’에 더 관심을 기울였다. 16개의 지(志) 중에서 거의 반에 가까운 7지(본리지·관휴지·예원지·만학지·전공지·위선지·전어지)를 차지하고 있다. 행포지, 경솔지, 옹희잡지, 난호어목지, 의상경계책, 종저보 등도 농업 책.

또 그는 시를 거의 짓지 않았는데, 이는 자신이 본래 시를 잘 못 짓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인 이유는 시작(詩作)에 근본적인 회의가 들어있기 때문일 것이다. 시가 실용학에 거의 기여를 하지 못하니 말이다. 시경강의에서 보여준 『시경』에 대한 탁월한 분석력을 본다면 시를 짓지 못할 이유도 없지만 굳이 나서서 짓는 일은 일부러 삼간 것 같다.


그는 15년간의 사환생활의 막바지 경에 평소에 절친하게 지내던 규장각 검서관 성해응(成海應, 1760-1839)과의 대화에서, 벼슬을 저버리고 귀농해서 농사지으며 멋지게 살아보겠다는 자신의 속내를 토로하기도 했다. 당상관(堂上官, 정3품 이상)이었던 그의 이런 마음은 당시의 사대부와는 판연히 다른 꿈을 꾸고 있었다. 19세기가 아무리 농경사회라 해도 농업을 천시하는 경향은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서유구는 이 같은 당시의 농업 천시 풍조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벼슬하지 않을 때는 경독(耕讀), 그러니까 농사와 공부를 병행하는 게 당연했다. “밥 버러지가 되지 마라. 관직이 없는 이들은 자기 식솔의 의식주는 자신이 책임져라. 주경야독의 건강한 선비정신을 지켜라.“ 서유구가 주장했던 말들이다.

풍석은 60세에 제2의 인생을 살았다. 교정, 추가, 삭제, 표제어 변경 등 책의 꼴을 갖추기 위한 중요한 작업들을 손에 놓지 않으면서 수원유수인 74세의 나이에 자신의 ‘임원경제학林園經濟學’을 실현하기 위해 번계(樊溪, 서울 번동 지역에 있던 북한산 자락)로 이사했다. 구상했던 건물과 조경 등을 실현해보았고, 거기서 후배들과 시 모임을 조직하기도 한다. 『임원경제지』는 말년에서야 비로소 완성이 되었다. 정확한 연대가 제시되어 있지 않아 확정 짓기는 어렵지만, 여러 정황 상 그의 나이 79세(1842) 때 즈음하여 어느 정도 정리가 끝난 것 같다. 서유구는 책을 간행하는 ‘선수’였다. 『종저보』『계원필경』『보만재집(16권 8책)』을 간행했다(1838). 초고본인 ‘오사카본(오사카 부립나카노시마도서관 소장본)’과 후대의 전사본을 비교해본 결과 완료를 선언한 후에도 그는 보완은 계속 되었던 것 같다. 이 오사카본 목차에는 없던 내용이 규장각본(서울대 규장각본)에나 고려대본에 대폭 보완되었고, 16지 서문도 별책으로 묶었던 사실은 완료 후 추가가 계속되었음을 알려준다.

자신의 묘표 <오비거사생광자표>를 작성하고 3년이 지난 뒤 풍석 서유구는 영면한다. 고종 치세기에 영의정을 역임한 이유원(李裕元, 1814-1888)은 풍석의 마지막 장면을 이렇게 전했다.
풍석 태사(太史)께서 82세에 병이 위급해지자, 시중드는 자에게 곁에서 거문고를 타게 하고는 연주가 끝나자 숨을 거두었다. 이는 지인至人이 형체를 잊어버리고 혼백만 빠져나가 신선이 된다는 일과 같다. 내가 공의 가장家狀을 열람하다 이곳에 이르면 사실을 접할 때마다 멍해져서 감탄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임하필기林下筆記)
젊은 시절(40-50대) 들판에서 힘쓰는 일을 하면서 자신의 몸 보양을 잘 했기에, 상늙은이 대접을 받던 환갑이 다 된 나이에 사환의 길을 다시 가기 시작했고, 수많은 정치적 풍파를 겪으면서도 무려 15년이나 고위 공직 생활을 영위했으니, 진퇴와 건강에 대한 깊은 수양이 없었다면 범인이 흉내 낼 수는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이런 공력이 이어져 마지막 순간에 죽음을 예감하고 그 시간을 조절한 것이다. 건강 증진을 위한 여러 도인법導引法을 소개했는데, 이 중 자신이 전신의 여러 곳에 좋은 도인법을 정리한 대목도 있다. 이 도인법을 자신이 실천하며 건강을 유지했을 가능성이 높다.

생존 시에도 서유구는 많은 이들에게 훌륭한 신하로, 학자로 인식이 되어 있었다. 말년에 살았던 번계에서의 시회에 참여한 문사들도 『임원경제지』를 알았고 그 책에 무엇을 담고 있는지도 대략 알고 있었다. 여기서 일일이 소개하지 못하지만, 이와 관련한 시가 여러 편 있다. 경화세족의 일파인 풍산 홍씨 가문의 홍석모(洪錫謨, 1781-1857)는 말년에 다산의 거주지인 두릉(지금의 남양주시 양수리)에 거처를 삼았던 풍석을 회고하며 이 두 거인을 대비하는 시를 지었다.
다산의 공적 진기한 책 상자로 남았고, 풍석의 문장 경전 연구로 노숙하였네. 두릉 강변은 오늘날의 명승지라! 당시 사람 다투어 ‘문성(文星)이 한데 모였다’ 말했지.(도애시집陶涯詩集)
박지원의 손자 박규수도 『임원경제지』를 읽고 난 소감을 “은퇴하신 풍석 서 판서께 바친다”는 시의 후반부에서 아래와 같이 표현했다.
나라의 병폐 고칠 경륜 깊이 감추고 임원의 즐거운 일 나눠 즐기실 뿐. 내 와서 『임원경제지』 구해 읽어보니 신기루 속 보물처럼 엿보기도 어려워라. 지금 사람들 사공事功을 말단이라 하찮게 여겨 정서(政書)와 농서에 좀 쏠릴 지경. 유독 공의 의론 두 귀로 익히 들었건만 학문에 적용함이 없으니 실로 부끄러워라.(『환재집瓛齋集』)
풍석의 실용적 학문 추구에 대한 존경과 이런 소신에 미치지 못하는 자신을 비유하고 있다.

오늘날 ‘노블레스 오블리제’라는 어려운 말이 일반인의 입에도 쉽게 오르내릴 정도라면, 고위층의 도덕적 의무가 거의 실현되지 않았다는 우리 시대의 시대적 풍토를 알 수 있다. 그러면 서유구가 활동했던 시대에도 그랬을까. 흔히 알고 있듯이 고위직에서 나라의 녹봉을 받으며 위세를 과시했던 이들이 모두 타락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조선의 현실을 개선하기 위해 수많은 고민을 했을 것이다. 이런 고민은 ‘실학자’들의 전유물이 아닐뿐더러, 과거 공부 내용이 바로 이런 점들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에 거의 모든 유학자들의 평생의 짐이자 의무이기도 하다. 우리 식으로 얘기하면 ‘선비정신’을 올곧게 유지하고 심화하는 고위층도 있었다는 말이다. 그것도 아주 많이. 선비정신의 중요한 덕목 중 하나가 우환의식(憂患意識)의 철저성일 텐데, 이 우환의식을 그들의 삶 속에서 어떻게 실행했는가가 이런 인물을 평가하는 주요 요소일 것이다.
그러면 서유구의 우환의식은 무엇이었을까.  “지식인의 인생은 두 가지가 있다. 벼슬하는 삶과 벼슬하지 않거나 벼슬하기 위해 준비하는 삶.(『임원경제지』) “ 그런데 당시 지식인들의 문제는 그들 모두가 모두 벼슬의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이다. 유학 경전을 달달 암송했으니, 유학에서 추구하는 이상적 세계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입으로 읊을 수 있었다. 그러나 벼슬하지 않는 이들은 그런 자신의 신념과 이상을 실험해 볼 무기(권한 또는 권력)가 없는 사람이다. 무기도 없고 전쟁터도 나가지 않은 사람이 집에 들어 앉아 허구 헌 날 전쟁 전략을 짜고 전술만 부리고 있다면, 그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그 사람을 가장이라고 떠받들고 사는 가족들은 어떻게 살아가란 말인가.
19세기 경이 되면 관직은 경화세족을 비롯한 일부 벌열閥閱 가문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관직의 수는 한정되어 있다. 돈으로 한 자리 사기도 했다. 이런 시기에 과거를 통해 관직에 진출할 수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되겠는가. 그럼에도 사대부 집안에 태어나면 의례 과거에 매달리면서 다른 일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는 이들이 많았다. 당시의 사회적 폐해를 지적하는 논자들은 이 문제를 심각하게 거론하고 있었다. 서유구는 이 인구에 주목한 거다. 사대부로서 벼슬하지 않는 이들이여, 공부를 하지 말라고는 않겠다. 농사 지으면서 공부해라, 물고기 잡으면서 공부해라, 장인 일도 익히면서 공부해라, 돈 벌고 돈을 관리하는 일에도 신경 쓰면서 공부해라. 그러면 살림살이는 조금씩 나아지고, 이와 더불어 나라의 경제도 여유로워질 것이다. 그래서 나는 철학(유학)과 관련된 이야기, 정치와 관련된 이야기는 않겠다. 오로지 시골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의 문제에만 집중하겠다. 이 오래된 문제의식의 결정판이 『임원경제지』였던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서유구는 어떤 사람이었는가. 지식의 완벽을 추구한 장서가였고, 문향의 예술적 운치를 즐기고 평가하는 예술평론가였고, 선수처럼 책을 잘 만드는 저술가였고, 백성의 삶을 윤택하게 하려 했던 목민관이었고, 벼슬하지 않을 때는 논밭을 다니며 먹을거리를 생산하는 농부였고, 임진강 하구에서 물고기를 잡아 생계를 유지한 어부였으며,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공부하는 처사였고, 장인의 수많은 영역의 일을 조사하고 기록한 공학자였고, 집 터 잡고 집 짓고 집 꾸미는 일에 깊은 조예를 가진 건축가였고, 동의보감보다 더 많은 의학지식을 체계적으로 정리해낸 의학자였고, 음식을 맛깔스럽게 만들 수 있도록 세밀하게 설명해준 음식전문가였다.

 

Seo_Yu-g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