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례지(鄕禮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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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례지(鄕禮志)」는 의례 백과사전으로 5권 2책, 86,930자, 3.4% 비율로 간추릴 수 있다. 향촌에 사는 선비라면 반드시 알아야 하는 지역 공동체 관련 예법인 향음주례와 향사례, 관혼상제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향례지

‘향례鄕禮’는 ‘향촌에서 시행하는 의례’라는 뜻이다. 본래 ‘향鄕’은 왕성 안에 있는 백성들의 거주지라는 뜻이었는데 후대에는 외진 고을을 뜻하게 되었다고 풍석은 설명한다. 따라서 왕성에서 떨어진 곳에서 시행하기에 편한 의례를 담았다고 했다. 「향례지」내용은 서유구가 정조 통치기에 규장각에서 편찬 사업을 하던 이력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정조가 서울과 지방의 향음鄕飮의 예를 바로 세우고자 역대의 향음 의식을 책으로 만들게 할 때 향약鄕約을 포함시키라는 상소가 올라왔고 풍석이 『향례합편鄕禮合編』을 편찬하면서 이전 자료를 참고해 지금 시대에 맞게 새로 의례를 만들어서 정조에게 바쳤다고 밝혔다. 당시 정조는 풍석이 제안한 새로운 예법 대로 시행하길 거절하였고 이런 저간의 사정을 풍석은 『금화집』에 기록한 뒤 이를「향례지」에서 재인용한다. 『향례합편』은 총3권이고 「향례지」는 5권이다. 옮기는 과정에서 일부는 빼고 일부는 다른 책에서 추가했다. 『향례합편』에서는 관 · 혼만 다루었지만 「향례지」에는 상 · 제까지 보완하여 명실상부한 ‘향례’를 갖추었다.

「향례지」권1은 <통편>으로 “향음주례”를 먼저 다룬다. 주 · 당 · 송 · 명 · 조선의 향음주례를 포괄하고 풍석이 정리한 ‘새로 정한 향음주례’로 마무리한다. 향음주례는 고을 수령이 주관하여 향촌의 선비나 유생들이 향교나 서원 등에 모여 술을 마시며 잔치를 하는 향촌 의례이다. 이 때 학덕과 연륜이 높은 이를 주빈으로 모시고 그 다음가는 사람을 개介로 삼고 그 다음가는 유생을 중빈衆賓으로 초대한다. 이어지는 여러 규칙이 있는데 시대에 따라 조금씩 변형되었고 조선에서도 변형이 일어났기에 풍석은 윗대의 24단계의 절차를 11단계의 절차로 바꿔 시행토록 제안한다. 향음주례는 단순히 먹고 노는 행사가 아니라 한 나라의 질서 유지를 염두에 둔 자리였기에 절차가 필요했었다. 권2는 <통례> 가운데 “향사례”를 소개한다. 향사례는 봄·가을 두 계절에 백성을 모아 활쏘기를 하며 예와 악을 익히게 하는 행사다. 주나라 향사례는 52단계이나 풍석은 16단계로 간소화하고 매년 2회 시행하던 규정을 늦봄 1회 시행으로 개정한다. 권3은 <통례> 세 번째로 향약을 다룬다. 마을의 자치규약인 향악은 덕업상권, 과실상규, 예속상교, 환난상휼의 네 강목을 지키자는 운동인데 조선 중종 이후 김안국이 『여씨향약』을 배포한 이후 전국에 보급되기 시작하고 율곡이 지은 ‘사창계의 약속’이 실생활에 적용한 사례를 보여주어 풍석이 이를 인용해 운영 방침 등을 제안한다. 권4 · 5는 의례인 관혼상제를 소개한다. 권4에서 관례冠禮와 계례笄禮, 혼례의 절차와 기준이 되는 나이 등을 제시하고 권5에서 상례喪禮와 제례祭禮를 다룬다. 권5가 내용으로나 기사 수로나 가장 복잡하다. 그 만큼 절차가 복잡함을 알 수 있다. 특히 상례는 「향례지」 전체의 30.6%를 차지할 만큼 비중이 크다. 총 19단계의 절차를 제안하는데 이 절차는 조선의 예학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던 『가례』의 내용을 본줄기로 삼고 이를 주석한 여러 예학서를 인용해 구성했다. 조선은 ‘기해예송’과 ‘갑인예송’ 논쟁으로 정권이 바뀔 만큼 상례에 대한 논쟁이 많았는데 풍석은 『상례비요喪禮備要』를 인용해 「향례지」 권5의 상례 부분을 편찬한다. 풍석은 처음 「향례지」를 ‘상례’로만 한 권을 구성할 계획이었던 것 같다. 오사카본을 보면 상례에서 장이 끝나고 ‘제례’에서 새로운 권을 명기해 놓았는데 나중에 상례와 제례를 이어 붙여 한 권으로 묶은 듯하다. 제례의 양이 많이 않았기 때문이다.

풍석은 「향례지」에 향음주례, 향사례, 향약, 관혼상제를 실어 가정과 마을 공동체의 화목과 질서를 만들려 노력했다. 개인주의가 시대정신이 된 지금 시대에 풍석의 이런 저작물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의례는 의식주가 갖춰진 이후에나 생각할 수 있는 문화이다. 19세기 풍석의 시대와 비교할 때 지금 우리는 더 가난해진 것은 아닌지 의구심이 든다. 「향례지」는 16지 가운데 가장 체제가 간단하다. 소제목, 표제어, 기사의 수가 적은데 이는 향례의 대강이 풍석의 머릿속에 정리되어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현존하는 필사본은 오사카본, 규장각본, 고려대본이다. 오사카본 「향례지」의 권두 부분은 초기 편집 체제와 뒷날 확정한 편집 체제를 동시에 보여준다. 권1~4까지 교정 지시가 거의 없다. 옮겨 왔기 때문이다. 권5는 처음 정리한 부분이라 보충 · 삭제 · 추가 · 이동 지시가 여러 곳에 있다. 「향례지」오사카본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전권의 서체가 동일하다는 점이다. 심지어 권5의 교정 지시 서체도 대부분 같아 보이는데 자신의 견해를 쓴 ‘안설’ 부분까지 같은 것으로 보아 이 책은 풍석 자신이 전부 쓴 것으로 판단된다. 만약 이 오사카본 「향례지」를 풍석이 직접 필사했다면 그 이유가 무엇일까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향례지」에 인용된 문헌은 총 21종이다. 『상례비요』가 가장 많고 『가례』가 그 다음이다. 인용한 풍석 자신의 저술은 『풍석집』이 유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