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용지(贍用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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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용지(贍用志)」는 건축 · 도구 · 일용품 백과사전으로 4권 2책, 총 99,076자로 이루어져 있으며 전체 분량에서 3.9%를 차지한다.

섬용지

‘섬용贍用’은 ‘쓰는 물건을 넉넉하게 한다’는 뜻이다. 임원에 거주하는 데 필요한 물건을 넉넉하게 쓰려면 집과 가구와 소품 일체를 제대로 만들고 활용할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 듯하다. 집 짓는 법, 건축 자재, 에너지 및 상수도 공수 도구, 주방 용기, 의복 손질 도구, 욕실 도구, 실내 인테리어 가구 및 용품, 염색 재료, 에너지 소비 도구, 교통수단, 운송 도구, 측정 도구, 공업의 실제와 공업의 이해 등으로 풀이 할 수 있는 대제목들로 이 지를 구성한다. 19세기 초반은 장인의 손길을 거쳐 소량으로 상품이 생산되던 가내수공업 시대였는데 조선은 상공업 천시 풍조로 인해 “거칠고 졸렬한” 수준의 물품만이 생산될 뿐이었다. 이에 풍석은 중국산을 수입하는 상황은 선진문물을 받아들여 온 오랜 관습으로 여겼지만 일본산까지 수입해야 할 지경이 되었다는 데 대해 수치심을 느끼노라 했다. 「섬용지」를 읽는 이에게 조선의 기술 수준에 분개하라고 권한다. 서문에서 시작된 이런 풍석의 ‘반성’은「섬용지」의 마지막 주제인 ‘공업 교육’에까지 이어진다.

「섬용지」는 16지 가운데 풍석 자신의 저술이 가장 많이 반영된 지다. 『금화경독기』에서 44.2%나 인용하여 편집했다(남아 있는『금화경독기』에는 「섬용지」에 인용된 부분이 없다). 이는 조선의 문헌에서 「섬용지」 편집에 참고할 만한 기사가 거의 없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당시의 현장에서 일하던 장인들이 글이나 그림으로 자신들의 기술을 정리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당시 장인들의 기술이 더러 수준 높은 성과를 낳았을 수도 있겠지만 풍석이 보기에는 대개 ‘거칠고 졸렬했다.’ 그런 판단이 16지 안에 「섬용지」를 편집하게 했을 것이다.

「섬용지」에는 가옥을 비롯한 여러 건축물, 그리고 주요 일용품과 배 · 수레 · 가마 등 교통수단, 흙 · 나무 · 돌 · 금속 등의 원재료 가공 등 굵직한 공산물들이 주요한 소갯거리이다. 당시에는 너무 흔해 빠져 기록할 가치가 없다고 여겼던 물건조차도 하나하나 모두 적어 놓았다. 덕분에 요즘은 보기 힘든 갈퀴, 망태기, 튀김용 국자, 바랭이, 자배기, 배자, 양치물 컵, 세숫대야 깔개, 세수치마, 민자, 빗 상자, 양탄자, 금박, 은박 등의 물품을 알 수 있다.

「섬용지」는 자연물로부터 인공물을 만들어내는 방법에 관한 책이다. 그런데 그림이 두 군데 밖에 없어 「섬용지」의 설명만으로 물품을 복원해 내기에는 한계가 있다. 「본리지」가 ‘먹을거리’, 「전공지」가 ‘입을거리’에 관한 지라면 「섬용지」는 ‘살 곳’에 관한 지이다. 앞의 두 지에는 따로 도보圖譜를 두었지만 「섬용지」는 「이용도보利用圖譜」를 구상만 하고 실제로 만들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풍석은「섬용지」를 편집하며 두 가지 방식으로 기사를 작성한다. ‘이동 곡간(搬庫)’ 이나 ‘깨진 노구솥 땜질하는 법’에 대한 해설은 매우 상세하여 실제 재현이 가능할 정도지만 몇 몇 표제어는 설명만으로는 재현이 힘들 정도로 설명이 소략하다.

「섬용지」권1은 <집 짓는 제도>, 권2는 <집 짓는 재료>, <나무하고 물 긷는 도구>, <불로 요리하는 도구>, 권3은 <복식 도구>, <몸 씻는 도구와 머리 다듬는 도구>, <방 안의 도구>, <색을 내는 도구>, 권4는 <불 때거나 밝히는 도구>, <탈 것>, <운송 기구> <도량형 도구>, <공업 총정리>로 구성되어 있다. 집 짓는 법과 관련하여 조선집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가옥에서 나오는 찌꺼기나 배설물을 거름으로 사용토록 구조적 배치에 신경 쓰라 하고, 또 한옥의 장단점에 대해서 설명한다. 이 가운데 <방 안의 도구> 항목에「이운지」에서 다룬 도구들을 중복하여 실은 부분이 있는데 풍석은 ‘일상적인 것까지 두루 싣고 있기에 중복이 문제되지 않는다’고 했다. 권1~4까지 당시의 공업 발달 수준을 한 눈에 알아 볼 수 있도록 정리한 뒤 마지막 “공업 교육”조에서 사대부도 공업 교육에 뜻을 두어야 함을 역설했다. 장인을 대우해야 하고 상업 발달이 공업 발달과 연관이 있다고 주장한다. 물품 제조 기술이 뒤떨어지면 예를 제대로 차리기 어려우며 나라의 구성원 모두 각자의 직분을 다할 수 없기 때문이다. 농법·수차 제도가 강구되지 않아 농부의 직분이 엉성하고 길쌈 도구가 갖춰지지 않아 길쌈 아낙의 직분이 엉성하니 사대부는 성인의 도를 본 받아 농·공·상에 모범을 보여야 한다는 것이다.

「섬용지」는 4종의 필사본이 전한다. 오사카본은 권3·4만 남아 있는데 결본인 권1·2는 버클리본이다. 오사카본의 편집지시와 다른 필사본을 비교해 보면 오사카본을 보완한 가장본을 토대로 고려대본이나 규장각본이 정립된 것이 분명하다. 오사카본은 완성되지 않은 원고였다. 「섬용지」에 인용한 문헌은 총 72종이며 이 가운데 풍석의 『금화경독기』와 송응성(宋應星, 1590~1650)의 『천공개물』이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한다. 일본의 상황을 보여준 『화한삼재도회』가 비중 있게 실려 당시 일본의 기술 수준이 조선보다 뛰어났음을 보여준다. 박지원의 『열하일기』에서는 중국의 우수한 기술을 본받아야 한다는 기사를 인용했고 『증보산림경제』와 『반계수록』에서는 특정 문제를 해결할 비법을 인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