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 / 임원십육지(林園十六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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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원십육지

풍석 서유구 선생은 문헌에 나오는 사실과 현실에서 경험한 사항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113권 54책 16지로 구성된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를 썼다. 농업, 건축, 요리, 의학 , 공학, 상업등 당시 조선사회의 각 방면에 걸친 지식들을 종합하여 분류한 백과사전의 백미이다.

16지의 구성과 주요 내용은 각각 다음과 같다.

『본리지(本利志)』는 곡식 농사 백과사전으로, 13권 6책이다. 『임원경제지』에 수록된 16지 113권 중 첫 번째 지로서, 『인제지』와 『이운지』 다음으로 분량이 많다. 이 책은 농사에 관한 총론을 포함하여 주로 곡물 농사에 관한 지식들을 망라했다. 본리란 밭 갈고(本) 수확한다(利)는 뜻이다.

『관휴지(灌畦志)』는 채소·약초농사 백과사전으로, 4권 2책이다. 16지 중 분량이 가장 적다. 관휴(灌畦)는 ‘휴전(畦田)’에 물을 댄다는 뜻이다.

『예원지(藝畹志)』는 화훼 농사 백과사전으로, 5권 2책이다. 예원은 넓은 밭에서(畹) 화초를 가꾼다(藝)는 뜻이다.

『만학지(晩學志)』는 과실·나무 농사 백과사전으로, 5권 2책이다. 만학은 늘그막에 나무 농사를 배운다는 뜻으로 보인다.

『전공지(展功志)』는 의류 백과사전으로, 5권 2책이다. 전공은 부공(婦紅, 길쌈)에 관한 내용을 펼친다는 말이다..

『위선지(魏鮮志)』는 기상과 천문을 관찰하여 농사의 풍흉을 예측하기 위한 백과사전으로, 4권 2책이다. 위선은 한(漢)나라의 유명한 천문가의 이름이다.

『전어지(佃漁志)』는 목축·양어·양봉·사냥·어로 백과사전으로, 4권 2책이다. 전어는 사냥과 어로(漁撈)라는 뜻이다.

『정조지(鼎俎志)』는 음식요리 백과사전으로, 7권 4책이다. 정조는 솥과 도마를 말한다.

『섬용지(贍用志)』는 건축·도구·일용품 백과사전으로, 4권 2책이다. 섬용은 쓰는 물건을 넉넉하게 한다는 뜻이다. 쓰는 물건이란 임원에 거주하는 데 필요한 물건이다.

『보양지(葆養志)』는 건강(양생) 백과사전으로, 8권 3책이다. 『인제지』, 『이운지』, 『본리지』 다음으로 많은 분량이다. 보양은 몸을 잘 길러 건강을 유지한다는 뜻이다.

『인제지(仁濟志)』는 의학 백과사전으로, 28권 14책이다. 『임원경제지』에서 가장 많은 분량이며 무려 총 44퍼센트를 차지한다. 인제는 백성에게 혜택을 널리 베풀고 어려움을 구제한다는 뜻이다.

『향례지(鄕禮志)』는 의례 백과사전으로, 5권 2책이다. 향례는 국왕이 거처하는 도성 이외의 향촌에서 시행하는 의례라는 의미이다.

『유예지(遊藝志)』는 교양 백과사전으로, 6권 3책이다. 유예는 “예에서 노닌다(遊於藝)”는 『예기』와 공자의 말에서 왔다. 예는 예(禮)·악(樂)·사(射)·어(御)·서(書)·수(數)를 의미하는 육예(六藝)를 가리킨다.

『이운지(怡雲志)』는 문화예술 백과사전으로, 8권 4책이다. 『인제지』 다음으로 분량이 많다. 이운은 산중의 구름을 혼자서 즐긴다는 의미로, 임원에 살면서 여가에 즐길만한 일들을 표현한 말이다.

『상택지(相宅志)』는 풍수 백과사전으로, 2권 1책이다. 『관휴지』 다음으로 분량이 적다. 상택은 살 곳[宅]을 살핀다[相]는 뜻이다.

『예규지(倪圭志)』는 생활경제, 즉 상업 백과사전으로, 5권 2책이다. 예규는 백규(白圭)의 상술을 곁눈질한다(倪)는 뜻이다. 백규는 중국 전국시대 위(魏)나라에서 활동했으며, 시세 차익을 이용해 재물을 모은 사람으로 유명하다.

「본리지(本利志)」는 곡식 농사 백과사전으로, 13권 6책, 총 151,254자로 전체 『임원경제지』안에서 6.0%를 차지한다. 농사에 관한 총론을 포함하여 주로 곡물 농사에 관한 지식들을 망라했다.

‘본리’란 봄에 밭 갈고(本) 가을에 수확한다(利)는 의미이다. 씨앗 하나가 수십 배로 불어나는 농사일을 가리킨다. 이때의 농사에는 채소나 과일, 나무나 화훼는 포함되지 않는다. 오로지 곡식을 키우는 일이 농사였는데 풍석은 「본리지」에서 곡물농사 외에도 농사의 범주에 들어갈 법하다고 생각하는 토지, 수리, 흙, 거름, 농시農時, 농사 철학 등의 모든 지식과 기술을 다루고 있다.

『임원경제지』는 「본리지」로 시작해 「예규지」로 마무리되는데 농사가 근본이고 장사가 말단이라는 풍석의 의도를 드러내는 편제다. 풍석의 다른 책인 『행포지杏蒲志』에 ‘스스로 농사를 지으며 기록한 내용을 정리했다’는 대목이 있어 스스로 농사를 지었음을 알 수 있는데 조정의 핵심 관료 였던 그가 이처럼 농사관련 저술에 매달린 이유는 당시 중심 학문이었던 경학經學과 경세학經世學의 한계와 모순 때문이었다. 앞 사람의 해설을 분석하고 자기 견해를 보탠다 한들 이미 중언부언인 한계와 아무리 국가제도나 국정운영에 대해 연구한들 흙국(土羹)이고 종이떡(紙餠)에 불과하다는 모순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그런 토갱지병 같은 노력은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할 뿐이라면서 유학자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버리면서까지 직접 농사를 지으며 자료 정리에 매달린 풍석의 노고가 「본리지」에 오롯이 담겨 있다. 인간의 삶에 곧바로 활용할 수 있고 국가의 운영에 실질적인 힘이 되는 학문이 농업임을 설파한다. 하루라도 없으면 안 되는 것이 곡식이고 하루라도 몰라서는 안 되는 일이 농사라는 그의 선언이 「본리지」를 낳았다.

「본리지」권1은 <토지 제도>를 다룬다. “경묘법과 결부법”에서는 땅의 넓이를 재는 방법을 설명하면서 세금 부과 방법을 변경하자고 제안한다. 더불어 확실한 주척周尺(약23.1센티미터)을 고증해 낸다. “토지의 종류”를 소개하고 부록으로 “양전법”을 실어서 농지 측량 때에 백성과 수령을 속이는 아전의 농간을 줄여보려 노력한다. 특히 이 부분의 수학 관련 자료는 풍석의 아버지 서호수의 『해동농서』에서 인용한다. 「유예지」에는 할아버지 서명응의 『고사십이집攷事十二集』을 인용해 수학에 관한 자료를 정리하는데 당시 중국과 서양의 수학이론을 담고 있어 오늘날 귀한 자료가 되어 준다.

「본리지」권2의 주제는 <수리水利>이다. 농지에 물대는 기술을 정리하는데 물길 준설법, 지세 측량법, 방죽 쌓는 법, 쌓은 둑을 잘 보존하는 법, 물을 모으고 피당을 만드는 법 등을 중국의 문헌을 인용해 자세히 설명했다. 조선의 수리법은 엉성하므로 중국에서 배워야 한다는 것이 풍석의 생각이다.

권3에서는 흙을 분별하는 법과 농사의 때에 관해 다룬다. 다른 지역의 작물을 손질하면 풍토에 맞지 않아 잘 자라지 않을 것이라는 ‘신토불이’나 ‘토종’ 중시 사고를 배격하는 그의 입장이 드러나 있다. 외래종이라도 우리 땅에서 잘 수확되면 그것이 새로운 토종이라고 주장한다. 농시農時는 24절기 72절후로 나누어 때마다 해야 할 농사일에 대해 설명한 후 고정관념을 경계하라고 주문한다. 또 위도와 경도에 따라 농시가 달라져야 한다며 조선의 역법을 정리한다. “물후”항목은 이런 주장을 편 끝에 자연만물의 주기적인 변화현상을 살펴 농시를 감지하도록 ‘풀달력’을 설명하며 정리한 부분이다.

권4~6은 작물 농사의 실제 과정에서 필요한 지식과 기술들을 본격적으로 소개한다. 종자선택에서 밭갈이, 파종, 김매고 수확한 뒤 저장하기까지에 필요한 내용들이다. 권4에서 <농지 가꾸는 법>을 정리해 가족의 노동력을 고려해 ‘적당한’ 면적으로 농사를 지으라며 농사철학을 설파한다. 정신교육으로 제대로 된 농사꾼을 길러낼 필요를 느꼈기 때문이다.

권5와 6은 파종하고 가꾸기에서 수확, 방아 찧기, 저장에 이르기까지 농사의 나머지 공정을 다뤘다. 파종에 쓰는 종자 가운데 벼와 보리에 가장 공을 들였고 보리와 조의 견종법에 대한 해설은 조선 농업사 연구에 아주 귀중한 자료로 이용되기도 했다.

권7에는 모든 곡식의 품종과 명칭을 알려준다. 자신이 새로 도입한 품종도 소개되어 있다. 권8에는 농사의 다섯 가지 피해, 그 예방법, 뒤처리 방법에 대해 다룬다.

권9에서는 농가달력을 표로 제시하고 권10~13은 농사일에 쓰이는 농기구를 분류하고 그림으로 정리해 두었다.

「본리지」에는 농사의 전 과정이 들어 있다. 농사철학과 작물의 이름과 생태에 관한 세밀한 정보가 있고 생산량을 최대로 만들기 위한 농법이 있고 농업 정책이 있다. 선인들의 지혜의 총체를 모았다. 석유화학농법의 한계를 절감하고 유기농법이나 자연농법을 추구하는 이에게는 온고지신, 법고창신의 보고가 될 수 있겠다. 중국의『왕씨농서』가 가장 많이 인용되었고 풍석 자신의 『행포지』도 자주 인용했으며 조선의 문헌은 23종이 인용되었다. 얼핏 「본리지」가 95종의 인용서를 편집한 자료집으로만 보이겠지만 풍석의 견해가 추가되어 있고 글자를 교체하는 등의 편집의 묘가 발휘되어 있어서 후속 연구에 요긴하게 쓰일 수 있다. 그가 기사를 배치한 방법이나 순서 자체를 연구 대상에 포함시키는 방법으로 접근해야 한다.

「본리지」필사본은 총 4종이 확인된다. 고려대본, 국립도서관본, 규장각본, 서강대본이 그것이다. 아쉽게도 오사카본이 없다. 평양본에 「본리지」가 있는지 미지수이다.

「관휴지(灌畦志)」는 채소·약초 농사 백과사전이다. 4권 2책, 총 40,693자, 16지 가운데 1.6%를 차지하여 분량이 가장 적다.

관휴지

‘관휴灌畦’는 ‘휴전에 물을 댄다’는 뜻이다. 휴전은 풍석이 생각할 때 채소·약초 농사를 짓는 밭의 기본 구조를 의미한다. ‘휴’를 이랑, 두둑, 고랑으로 옮겼는데 의미가 통하지 않아 ‘두렁밭’으로 풀었다. 풍석은 채소 재배법으로 ‘구종법區種法’과 ‘휴종법畦種法’을 소개한다. 구덩이에 재배하는 법과 두렁밭에 재배하는 법으로 간추릴 수 있다. 구종법은 지금도 오이 호박 같은 넝쿨 채소를 키울 때 쓰이지만 휴종법은 당시에도 지금도 쓰이지 않는 재배법이다. 휴전은 밭을 6척마다 두렁으로 두르고 습기가 빠져 나가지 못하게 한 다음 두렁위에 앉아 김을 매도록 만든 중국식 밭이다. 중국 농서를 검토해 찾아 낸 농법으로 조선에서 꼭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관휴지에서 서유구는 육식은 “하늘이 준 본성을 거역하고 계교를” 써서 동물을 잡아먹는 일이고 “채식이 바로 하늘이 준 순리의 도리”이므로 채소나 약초를 키워 먹으라고 권한다.

「관휴지」권1에서는 이 같은 두렁밭 만들기와 함께 구덩이 밭 만들기를 설명하고, 이어서 심고 재배하기, 거름주기, 보관하기에 대한 총론을 서술하고 있다.

각론으로 구성된 제2~4권에 아욱·파·부추·생강·배추·무 등 채소류 33종과 구기자나물·콩나물·냉이·소루쟁이·씀바귀 등 나물류 55종이, 제2권에 김·미역·다시마·청각·매생이 등 바다채소 13종이, 제3권에 오이·호박·박·가지·토란 등 풀열매류 8종이, 제4권에 인삼·둥굴레·맥문동·더덕 등 약초 20종이 소개되어 있다. 개람芥藍 같은 작물은 조선에 나지 않기 때문에 손질해서 재배해야 한다는, 중국 작물의 도입에 대한 언급도 보인다. 각론의 내용에는 이름과 품종, 알맞은 토양, 파종시기, 파종과 가꾸기, 거름주기, 거두기, 보관하기, 종자 보관하기, 쓰임새 등이 있다.

이와 같은 내용은 뒤에 이어지는 「예원지」 · 「만학지」의 각 작물에 대한 일반적인 표제어이기도 하다. 이름과 품종을 앞세워서 특정 단어가 특정 사물을 지시하는 것을 명확히 하고자 했다는 점은 풍석에게 ‘명물학名物學’ 차원에서의 문제의식이 확고함을 보여준다. 배추는 구종법과 휴종법 외에 견종법으로 심도록 권한다. 두둑과 고랑을 만든 뒤 고랑에 재배하라는 것. 열종법은 가지 재배법으로 두둑을 높게 만들어 구덩이를 판 뒤 여기에 거름을 주어 재배하는 법이다. 둥구미를 만들어 가지를 재배하는 법도 알려주고 새로 도입된 작물인 고추재배법에 대해서도 알려준다. 콩나물이나 숙주나물은 물을 뿌려주지 않고 물에 담가 놓고 매일 물을 갈아주거나 거적에 물기를 머금게 한 뒤 그곳에 놓고 기르거나 축축한 모래를 자기그릇에 넣고 창고에 보관하여 기르라고 한다. 요즘은 먹지 않는 나물에 대해 소개하는 부분이 있는데 지금은 약초처럼 여기는 식물들이다. 울타리 만드는 법, 구기자나무, 오가피 나무, 회화나무, 잇꽃(홍화), 부들, 갈대, 참외 재배법에 대해서는 「만학지」를 참고해야 한다는 설명이 있어 교차 색인의 역할을 볼 수 있다.

「관휴지」는 총 4권으로 76종의 문헌을 인용해서 정리했다. 특히 정약전의 『자산어보』에서 6종의 해초류를 인용해 설명하면서도 물고기에 대해서는 『임원경제지』 안의 「전어지」에서 인용하지 않은 점이 특이하다.

「관휴지」는 4종의 필사본이 현존하며 다만 국립도서관본은 1책(제1·2권)만 전한다. 많은 부분, 이 책의 편집은 『왕씨농서』를 참조한 후에 이루어졌다. 서유구는 애초에 『왕씨농서』보다 300년 뒤에 저술된 『농정전서』에서 『왕씨농서』를 비롯한 여러 농서를 인용했으나, 뒤에 『왕씨농서』원본과 대조한 결과 여러 교정 사항이 생겼음을 「관휴지」에서 그대로 보여준다. 「관휴지」에서 30회 이상으로 인용된 서적은 『본초강목』, 『증보산림경제』, 『제민요술』, 『왕씨농서』, 『농정전서』, 『산거록』, 『행포지』, 『군방보』 등이다. 「관휴지」전체에서 서유구 저술 이외의 조선 문헌은 9.2%의 비율을 차지하고 서유구 저술을 포함하면 23.6%에 이른다. 또 『본초강목』·『제민요술』·『왕씨농서』·『농정전서』 등 중국 문헌과 『증보산림경제』·『행포지』·『해동농서』 등 조선 문헌에 들어 있는 채소·약초 관련 정보를 한곳에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책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하겠다.

「예원지(藝畹志)」는 화훼 농사 백과사전으로 5권 2책, 총 67,372자로 『임원경제지』전체에서 2.7%를 차지한다.

예원지

‘예원’은 ‘(화초를) 원畹에 가꾼다[藝]’는 뜻이다. 굴원이 시,「이소」에서 “내 이미 9원(九畹)에는 난초 기르누나! 또 100묘(百묘)에는 혜초 심지”라고 한 구절에서 따왔노라고 풍석이 밝혔다. 이 때의 화초는 「본리지」와 「관휴지」에서 다루지 않은 관상용 꽃과 풀이 대부분이다. 즉 먹지는 못하고 보기만 하는 식물 백과사전이 되겠다. 평범한 사대부들이 먹고 살기도 힘든 상황인데 화훼를 키우라는 풍석의 주장에 대해 호사스런 취미로 여겨 폄하하거나 완물상지玩物喪志 된다며 경계할까 저어되었는지 「예원지」를 저술한 자신의 의도에 대해 <서문>에서 부연 설명한다. 즉, 사람에게는 오관五官이 있고 곡식·채소·고기 등은 오관 중 입만 길러주는 음식들인데 사람은 짐승과 달라 입과 배를 기르는 일로만 만족하지 못하고 완상거리를 찾는 일도 중요하다는 것. 그는 “사물을 기르는 데 ‘허’가 있고나서, ‘실’을 기를 수 있어야 온전하게” 된다며 “허를 기르는 것이야말로 실을 기르는 근원”이 아니냐고 반문한다. 강희안의 『청천양화록』을 인용하며 완물상지라는 경계론을 격물치지라는 유학의 핵심 틀로 되받아친다. 화훼 기르기와 감상 역시 인간의 심성을 도야하는 데 필요한 정서적 자영분이라는 그의 생각은 예술의 기능에 대한 통찰에서 나온 듯하다. “만약 우리 사람에게 보탬이 될 만한 것들을 찾고자 한다면, 반드시 오관을 모두 만족시키는 것을 찾은 뒤에라야 좋을 터이다”라는 서문에서 그가 균형감각을 추구하는 사람임을 알 수 있다. 「예원지」는 모두 5권이다.

권1은 <총서>이고, 권2·3은 <꽃류>, 권4는 <훼류>, 권5는 <꽃 이름 고찰>이다. 순서대로 파종법과 옮겨 심는 법, 접붙이는 법, 물 주고 북 주는 법, 꽃나무를 손질하거나 특정 모양으로 만드는 법, 보호하는 법, 화훼나 화분의 배치법, 화훼류에 대한 다양한 품평, 절기 맞추기, 개화 시기를 앞당기는 법, 꽃 색 바꾸는 법, 보관하는 법 등을 다룬다. 채소와 약초 농사를 소개한 「관휴지」, 나무나 넝쿨열매를 다루는 「만학지」와 총론에서 서로 겹칠 법하지만 그렇지 않다. 화훼류에만 적용되는 노하우들이 얼마나 다양한지 여기서 살필 수 있다.

50종의 꽃류를 다른 권2·3 가운데 권2에서 모란 · 해당화 · 매화 · 백일홍 · 무궁화 등 나무에 꽃이 피는 목본류 총 22종이 소개되고, 권3에서 난화 · 국화 · 함박꽃 · 수선화 · 양귀비 · 패랭이꽃 등의 초본류 28종이 소개된다.

권4에서는 15종의 훼卉류를 소개한다. 여기에는 석창포 · 파초 · 만년송 · 종죽 · 종려 등 주로 꽃보다는 잎과 줄기의 아름다움을 즐기는 초목들이 들어 있다.

“방 남쪽 작은 언덕에 파초 네댓 그루를 새로 심었는데, 어느새 십여 척으로 자라 저물녘 그늘이 창을 덮어 안석과 평상, 서책과 책갑이 이 때문에 맑고 푸르러 좋아할 만했다. 이 때 매우 무더웠는데, 나는 폐병으로 앓아누워 땀이 줄줄 흘렀으며 정신이 몽롱하고 기운이 빠져 잠이 든 듯한 때가 여러 번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섬돌 사이에서 또로록 또로록 하는 소리가 들리면서 청량한 기운이 얼굴을 때리는 것이었다. 일어나 보니 뭉게구름이 빽빽이 펼쳐지고 빗방울이 갑자기 파초 잎을 치고 있었다. 무성한 잎에 후두둑 후두둑 떨어져 구슬처럼 흩어져 떨어지니, 내가 귀 기울여 오랫동안 듣자 정신이 상쾌하고 기운이 맑아져 병세가 호전되었음을 알았다.”와 같은 그의 문장을 보면, 「예원지」의 서술 역시 단순히 문헌을 인용 정리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직접 심고 가꾸면서 얻은 생활 속의 경험을 학문적으로 정리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권5에서는 앞에서 다룬 50종의 꽃 가운데 색이 다양하면서 어디에서나 쉽게 볼 수 있는, 따라서 품종의 분류가 매우 다양한 4종의 꽃 이름에 대한 연구서의 성격을 띤다. 비싸고 구하기 힘든 품종에 대해서도 소개하는 대목을 보고서, ‘경화세족京華世族’들을 염두에 둔 서술이라며 백성에 대한 배려가 부족하다고 비판하는 입장도 있기는 하다. 다만 당시 화훼류에 대한 분류학 관련 서적이 없었던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서 향촌 생활 전체를 아우르기 위한 시도로 평가할 수도 있겠다. 풍석은 매화 · 석류 · 연 · 노송 · 종죽 등은 「만학지」에서 다루고 있어서 꽃과 관련된 정보만 수록하겠다고 하여, 다른 지와 중복을 피하는 동시에 교차 색인이 되도록 했다.

「예원지」는 현재 3종의 필사본이 존재한다. 오사카 본에 편집지시가 남아 있어 저술 과정을 알 수 있게 한다. 「관휴지」에 비하면 편집 내용이 적고, 그 대부분도 한두 글자를 삽입하라는 지시이다. 권5는 교정이 한 군데밖에 없어 초기에 완정본이 성립된 것 같다. 오사카본은 ‘자연경실장’ 원고를 사용하지 않았다. 또한 오사카본의 편집 지시에 없는 대목이 전사본에 나타나, 오사카본이 고려대 본의 직접적인 모본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예원지」는 총 95종의 문헌을 인용했다. 재인용한 서적이 많아, 실제로 참조한 책의 수는 더 적다. 많은 인용서들이 『광군방보廣群芳譜』에 수록되어 있어서, 풍석이 대부분의 정보를 이 책에서 취한 것으로 보인다. 일본 책인 『화한삼재도회』도 24회 인용되었고, 화훼를 다룬 중국 문헌을 여럿 인용했다. 서명응의 『본사』나 풍석 자신의 『금화경독기』와 『행포지』를 재인용한 경우도 많다. 그는 인용 문헌을 비교하면서 그 차이를 밝히고 잘못된 것을 지적하는 치밀한 고증적 태도를 보인다. 더불어 중국과 일본의 화훼 재배법을 소개하면서도, 조선의 토양에 적용 가능한 방법을 제시하는 점이 돋보인다.

「만학지(晩學志)」는 과실 · 나무 농사 백과사전으로 5권 2책, 총 67,906자로 『임원경제지』전체에서 2.7%를 차지한다.

만학지

‘만학晩學’은 ‘늦게 배우다’라는 뜻이다. 과실이나 나무 농사의 정보를 모아 놓은 책에 그가 ‘만학’이란 이름을 붙인 이유는 밝히지 않았다. 나무 농사는 늦게 배워도 된다는 뜻인지, 아니면 자신이 늦게 관심을 가졌다는 뜻인지 모르겠다. 다만 서울 번계에 살며 지은 ‘종수가種樹歌’라는 시에 나이 들어 산촌에 살면서 나무 재배가 가장 좋은 방도임을 알았다는 대목이 있고, 시를 지을 당시 이미 「만학지」의 상당량을 집필해 놓았기 때문에, 늘그막에 귀농하여 전원주택을 짓고 여생을 즐기려는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배움이라는 의미로 이해하면 될 듯하다. 나무 재배에 관한 내용은 「이운지」, 「상택지」에서도 다루고 있다. 나무가 많으면 부유함이 제후의 그것과 비견할 만하여 백성의 풍속이 아름다워진다며 나무를 심을 것을 역설한다. 또한 나무 재배는 농정의 한 부분이라 중국 농서에서도 신중히 다루었으며 근본에 힘쓰는 일이라 했다. 그러나 조선으로 오면 사정이 달라진다. 농사 전반에 대해 서투르기 때문이다. 더구나 조선 사람은 나무 이름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문제가 있었다고 한다. ‘명물학名物學’적 차원에서 이름을 알아야 쓰임새를 궁구할 수 있다며, 한 사물이나 자연물을 가리키는 표준 지시어를 보급하고자 했다. 특정 사물이나 자연물에 대한 명칭이 성립된 뒤에야 비로소 그 재배법, 보관법, 치료법 등을 적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풍석은 ‘실질에 힘쓰는 사람’, 즉 ‘무실지가務實之家’가 진정으로 힘써야 할 곳이 바로 이 지점이라고 했다. 그가 했던 이 방대하고 지루한 작업도 이 무실지가를 자극하기 위함이었다.

「만학지」권1은 <총서>이고 권2는 <과일류>, 권3은 <풀열매류>, 권4는 <나무류>, 권5는 <기타 초목류>를 다룬다. 권1에서는 “씨 뿌리고 심기”, “접붙이기”, “거름주기”, “손질하기”, “보호하고 기르기”, “거두기” 등 나무와 과일을 얻기 위해 필요한 전 과정을 소개한다.

권2에서는 자두·매실·배 등 과일류 37종을 소개했다. 각론의 내용은 ‘이름과 품종’, ‘파종 시기’, ‘알맞은 토양’, ‘종자 고르기’, ‘파종과 가꾸기’ 등등을 다루었다. 특히 ‘이름과 품종’이라는 표제어는 모든 나무에 빠지지 않는데, 이를 앞세워서 특정 단어가 특정 나무를 지시하는 것을 명확히 하고자 했다.

권3에서는 참외 · 수박 · 복분자 등 풀열매류 14종에 관한 내용이다. 당시 최고의 품종이라는 경기도 광주산 수박의 재배법에 대해 매우 자세히 설명한다. 고구마에 대한 풍석의 애착은 지대하다. 1765년 일본을 통해 들어왔다고 소개하며 재배법이 널리 소개되기 전이라 구황작물로 맞춤하다고 보고 『종저보』를 지었고 그 책을 다시 이 「만학지」에서 재인용한다. 부록 기사에서 감자와 땅콩에 관한 정보도 소개하는데 그에 의하면 감자는 19세기 초반에 함경도를 통해 들어왔다고 한다.

권4에서는 소나무 · 측백나무 · 옻나무 · 닥나무 · 오가피나무 등 나무류 25종을 다룬다. 이 권의 표제어 내용은 권3과 비슷하나 표제어 수가 적고, 표제어가 이끌고 있는 기사의 양도 몇 개를 제외하고는 비교적 적다.

권5는 차 · 대나무 · 잇꽃 · 부들 · 담배 등 기타 초목류 13종을 소개한다. 이 가운데 ‘차’와 ‘대나무’가 ‘고구마’ 다음으로 분량이 많다. 이 두 종의 가공품을 향유한 층이 사대부에 국한되지는 않지만 주로 사대부임이 틀림없다. 차를 수입하는 유행이 번지자 직접 재배법과 가공법을 소개한다고 설명했다. 대나무 품종을 소개한 이유 역시, 조선에서 대나무 종류가 많지 않아 호사가들이 종자를 구입해 번식시키게 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이 외에 염료로 주로 이용되는 잇꽃 · 쪽 · 요람 · 지치와 자리 만드는 재료인 부들 · 갈대 · 왕골 · 골풀 · 매자기, 그리고 담배를 소개했는데 이들은 대부분 경제성이 높은 상업 작물이다. ‘담배’조를 보면 ‘이름과 품종’, ‘파종시기’, ‘파종과 가꾸기’, ‘치료하기’, ‘거두기’, ‘종자 거두기’, ‘제조’ 등의 목차를 두어 상세히 서술한다. 책을 통해 충분히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안배했다.

오사카본 「만학지」는 편집 지시사항이 비교적 많은 불완전한 초고이다.  오사카본은 ‘자연경실장’ 괘지를 쓰지 않아 편찬 시기가 ‘자연경실장’ 괘지를 쓴 것보다 앞서는 것으로 보인다. 오사카본에는 편집 과정에서 수정을 많이 했던 앞의 「관휴지」보다도 편집을 지시한 곳이 40곳 가까이나 더 많다. 이 가운데 특정 부분에 내용을 끼워 넣으라는 ‘삽입’ 지시가 31.7%(61)로 가장 많았고, 내용을 바꾸라는 ‘교체’ 지시가 29.1%(56)개, 내용을 지우라는 ‘삭제’ 지시가 20.8%(40개)를 차지했다. 이 세 지시사항이 전체 편집 지시 가운데 총 81.8%에 달했다. 수정사항이 많은 데 비해 “고구마”조 만은 수정 사항이 두 곳밖에 없는 것으로 보아 『종저보』가 완성된 상태에서 「만학지」에 인용했음을 알 수 있다. 128종의 문헌을 인용해 「만학지」를 편집했는데 조선 문헌이 전체 분량의 26.4%를 차지하고 나머지는 중국 문헌이다.

「전공지(展功志)」는 의류 백과사전으로 5권 2책, 총 58,462자이며 전체 분량에서 2.3%를 차지한다.

전공지

‘전공’은 ‘부공婦功을 펼친다’는 의미로 길쌈하는 방법을 설명한다. 주로 여성에게 부과된 노동이어서 부공으로 칭하는데 누에와 모시, 목화를 재료로 천을 만들고 염색을 거쳐 옷을 만들기까지의 섬세한 공정을 정리한다. 당시 사대부가의 부인들이 길쌈과 요리를 모르는 상황에 처해 있음을 이덕무는 자신의 책, 『사소절 士小節』에서 비판한다. 풍석 역시 「전공지」를 지어 길쌈의 방도를 실천하도록 방법을 서술한 후 그림으로 공정을 보다 분명하게 보여준다. 「전공지」에서 서술하는 길쌈과 양잠은 모두 중국의 기술이다. 우리나라의 기술 수준이 저열하다고 보고 중국의 제도와 방법을 본받기를 요구한다. 누에치기 뿐만 아니라 목면조차 뒤떨어진 전통만을 고수하는 조선의 현실을 비판한다. 당시 조선인의 의복 수요는 풍석이 보기에 목면을 으뜸으로, 삼베와 모시는 그 다음이며 누에가 마지막이었는데 어느 것도 수요를 채우기 어려울 만큼 생산량이 부족했다고 한다. 「전공지」를 통해 이런 열악한 조선의 상황을 개선할 선진 기술을 전파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전공지」 권1은 <누에치기와 길쌈(상)>을 주제로 한 책이고 권2는 <누에치기와 길쌈(하)>, 권3은 <삼베류 길쌈>과 <면 길쌈>, 권4는 <그림으로 보는 누에치기와 뽕나무 재배>, 권5는 <그림으로 보는 길쌈>을 주제로 한 책이다. 권1에서는 누에치기의 기본이 되는 “뽕나무 재배”와 “꾸지뽕나무 재배”에 대하여 다룬다. 토양과 파종시기와 종자와 이식, 접붙이기, 관리법, 가지치기 등으로 항목을 나누어서 뽕무나와 뽕잎을 얻기 위한 전 과정을 자세히 설명한다. 양잠의 근본이 뽕나무 농사이므로 「전공지」는 뽕나무에 대한 서술로 시작하는 셈이다. ‘부가사항’에서 뽕나무 껍질로 종이를 뜰 수 있음을 설명한 부분과 꾸지뽕나무잎을 누에에게 먹여 견사를 생산하면 중국 금과 비파의 현으로 좋다는 부분은 재현하고 싶은 욕구를 불러일으킨다.

권2에서는 ‘누에치기’에 관한 서술이 세세해서 거의 생물학의 실험관찰보고서를 연상시킬 만큼 깊이 있는 내용이라 농가에서 이 지시사항을 다 지켜가며 누에를 칠 수 있을지 의심스러울 지경이다. 조선의 비단 생산 기술이 뒤떨어진 데에는 상공업을 천시하는 풍조가 한 몫 했을 것이다. 이는 고려시대부터 이어진 우리의 관습인데 『고려도경』에 중국상인에게 비단을 사는 우리들의 이야기가 나온 이래, 풍석의 시대에도 개선이나 발전이 없었음을 알 수 있다. 풍석은 “염색” 조에서 염색을 옷감의 질을 결정하는 공정으로 소개한다. 전통염색 장인들은 「전공지」를 참고해 재현할 수 있겠다.

권3은 <삼베류 길쌈>과 <면 길쌈>을 소개하는 부분이다. 삼과 모시, 어저귀와 칡 등 목화 이외의 식물성 섬유 재배와 방직에 대해 다루는데 ‘길쌈하는 방법’을 소개하며 지리적 차이에 따른 품질의 격차에 대해서 언급한다. 남북 모두 베를 짤 줄 알지만 북이 더 낫다는 평가다. 면화에 대해 설명하는 항목에서는 중국의 품종은 여럿인데 우리나라는 문익점 이래로 단 한 종의 품종만이 전해졌는데 그 품종이 오래되다 보니 품질이 떨어졌으니 중국 품종을 들여오자는 주장을 편다. 더불어 중국 품종을 구할 수 없다면 대마도를 통해 일본 품종이라도 구해 재배하는 편이 우리나라 품종만 키우는 것 보다 낫다고 지적한다. 면화 재배법으로 감종법坎種法을 소개하는 점이 이채롭다. 구덩이를 파서 목화를 재배하고 그 구덩이를 하나씩 늘려 가면서 개간을 하게 되는 방식이다. 풍석은 심지어 옷감별, 오염의 종류별로 빨래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소개한다.

권4에서는 <그림으로 보는 누에치기와 뽕나무 재배>, 그리고 모시 재배 내용을 수록하여 사람들이 그림을 통해 중국의 발달된 제도를 쉽게 본받을 수 있도록 배려했다.

권5에서는 <그림으로 보는 길쌈>을 수록하여, 중국의 발달된 기계들을 본받아 태고 시절의 제도를 인습하고 있는 조선의 제도를 변혁시키고자 했다. 박지원도 조선과는 달리 기계의 힘을 빌려 고치를 켜는 중국의 소차를 본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듯이 당시는 여러 학자가 중국의 기술을 본 받아 조선의 방직기술을 개선하자고 주장하던 시대였다.

「전공지」는 오사카본, 고려대본, 규장각본, 연세대본인 총 4종의 필사본이 현존한다. 오사카본은 자연경실장 원고에 필사했다. 권4와 권5는 목차에도 없고 별다른 편집지시도 없는 것으로 보아 오사카본 성립 이후에 추가한 것으로 보인다. 오사카본의 권1과 권3에는 찬자와 교정자가 먹으로 이름이 지워진 반면 권2에는 1책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던 덕분에 서유구와 아들인 우보의 이름이 분명히 남아있다. 초고본인 오사카본에는 서유구의 편집 지시가 남아 있어서, 고려대본이나 규장각본으로 정리된 과정을 일부 보여준다. 오사카본을 그대로 정리한 연세대본과는 달리 고려대본이나 규장각본 권2의 <염색>부분에는 초고본에 없던 내용이 대거 유입됐다. 권3의 <빨래하는 여러 방법>에서도 그러하다. 오사카본과 연세대본에서 동일하게 권2의 ‘야생누에 기르는 법’이 누락된 것도 두 본의 친연성을 드러낸다. 고려대본은 권4와 5가 없고 규장각본은 권4와 5가 있지만 권4의 말미 부분이 떨어져 나간 부분이 있어 아쉽다. 「전공지」는 75종의 문헌을 인용했고 이 가운데 조선 문헌은 16.5%를 차지한다.

「위선지(魏鮮志)」는 기상천문 예측서로 4권 2책, 총 94,696자로 『임원경제지』에서 3.7%를 차지한다.

위선지

풍석은 「위선지」를 『임원경제지』에서 여섯 번 째 위치에 두어 일곱 번째인 「전어지」 서술 이전에 기후를 보고서 농사의 풍흉을 예측하는 법을 배치했다. ‘위선魏鮮’은 중국의 ‘위선’의 행적을 보고 배우자는 의미에서 붙인 이름이다. 위선은 한漢나라의 천문가로 일 년이 시작하는 날의 천문 기상을 보고 그 해 농사의 풍흉을 점쳤다고 한다. 「위선지」전체는 농사와 직간접적으로 연결 고리가 있는 기상현상, 천문현상, 동식물이 보여주는 자연현상 등을 통해 앞으로 닥쳐올 농사일을 점치고 예측하는 내용을 싣고 있다. 풍석은 중국 고대의 천문서와 농서를 비롯해 경서, 사서, 유서, 점서, 병서, 민간 자료 등을 모아 농사일에 도움이 되는 내용만을 선별해 편집했다. 그는 농가에 도움이 될 만한 기상과 천문 자료를 일목요연하게 보여주기 위해 <일 년의 예측>과 <비와 바람의 예측>으로 대제목을 나누고 그 아래 61개의 소제목을 두었다. 서유구 자신의 의견을 피력한 안설은 「위선지」전체에 걸쳐 69건이 실려 있다.

권1에서는 매달 기상과 천문현상이 농사 풍흉에 미치는 상응관계를 설명한다. 「위선지」에 있는 “3일에 갑자 천간이 들어가 있으면 그해의 수확은 상급이다.”라는 문장은 음양오행에 기반을 둔 당시의 세계관과 언어관, 역법 체계를 이해해야 한다는 번역자들의 깨달음을 낳았고 독자에겐 오행이론을 따로 배워야 할 필요를 느끼게 할 것이다. 권2는 하늘, 땅, 해, 달, 바람, 비, 구름 등의 천문 기상 현상과 초목, 곡식, 금수, 곤충 등의 자연현상을 통해 농사의 풍흉을 점치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권3은 주로 ‘별로 점치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고 권4는 권2와 비슷한 차례와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다른 지와 달리 「위선지」의 특이한 점은 서유구 저술 이외에 인용한 조선 문헌이 단 4종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아마도 조선 문헌에서는 이 지와 연관된 내용을 찾지 못했기 때문인 듯하다. 「위선지」전체에서 11.5%는 서유구 자신의 책인 「금화경독기」와 「행포지」, 「운기입식運氣入式」등을 인용해 스스로 서술한 내용과 『농사직설』, 『어우야담』, 『문견방』, 『북정일기』등의 조선문헌을 인용하고 나머지 대부분은 중국 문헌을 인용해 편집했다. 「위선지」는 규장각본, 고려대본, 오사카본이 전한다. 고려대본은 권1에서 권4까지 「위선지」 전체 2책이 남아 있는 유일본이다. 오사카본은 권1과 2를 묶은 전반부 1책만 남아 있다. 규장각본은 권3과 4의 후반부 1책만 남아 있다. 현재 통용되는 보경문화사의 규장각본 영인본의 「위선지」 권1과 2는 고려대본을 빌려다 영인한 것이다. 오사카본에는 편집의 흔적이 일부 남아 있다. 총11차례에 걸쳐 47글자의 두주가 기록되었다. 그 두주에는 차후 인용문헌의 저자를 확정하기 위해 저자명을 부기한 사례가 3군데, 오탈자나 빠진 글자가 있음을 염려하여 남겨 놓은 부기가 8군데 있다. 그 오탈자의 상당수는 현재 고적에 남아 있어서 확인이 가능한 『전가오행』, 『탐춘역기』, 『군방보』 등과 대조해 보면 서유구가 보았던 당대 판본과 이 책이 어느 정도 일치하는지를 알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위선지」는 162종을 인용해 편집했다. 『무비지武備志』와 『군방보』를 340여회 이상 인용했고 『관규집요』, 『전가오행』이 그 다음으로 자주 인용한다. 『무비지』는 명 말기 모원의(矛元儀, 1594~1644)가 편찬한 240권 체제의 병법 무예서이다. 이 책의 「점도재占度載」의 내용과 체제를 따와 「위선지」의 내용과 체제를 마련했다. 「군방보」는 명의 왕상진(王象晋, 1561~1653)이 유서類書로 총 30권이며 약 400여종에 달하는 곡식, 과일, 채소, 나무, 꽃, 차 등의 목록과 함께 이 작물들의 특성 및 약효, 재배, 원예, 병충해 처리, 파종 방법 등을 수록한 책이다. 풍석은 이 책을 『임원경제지』에서 62회 인용하며 중요하게 다루었다. 『전가오행』 역시 마찬가지 중국 문헌으로 서유구가 164회 인용한 문헌이며 농업 기상에 관한 점후서로 유명하다. 『전가오행』의 체제와 「위선지」의 체제 역시 비슷한 점이 있다. 상중하 3권으로 나누어 상권은 정월에서 12월까지, 중권은 천문, 지리, 초목, 새와 짐승, 비늘 있는 물고기 분류로, 하권은 삼순三旬, 육갑六甲, 기후, 연길涓吉, 상서祥瑞분류로 이루어져 있다. 이 대부분이 「위선지」로 들어와 있고 원문 전체를 옮겨 싣기도 했다. 「위선지」는 오행과 운기, 일진 등에 대한 개념사적 연구, 나아가 천문 기상, 자연현상과 농사 풍흉의 상관관계에 대한 역사적 통계 자료 연구가 뒷받침 되어야 제대로 조명될 것이다.

「전어지(佃漁志)」는 목축 · 양어 · 양봉 · 사냥 · 어로 백과사전으로 4권 2책, 총 88,433자로 3.5%의 분량을 차지한다.

전어지

‘전어佃漁’는 사냥과 어로를 의미한다. 이 외에 목축과 양어, 양봉을 다루는데 이 두 영역은 다른 일이라고 구별하면서 함께 편집한 의도를 설명한다. 이 두 영역은 네 가지 면에서 공통점이 있다. 첫째는 군대유지요 둘째는 놀이요 셋째는 재산 증식의 수단이요 넷째는 봉양이다. 따라서 ‘전어’가 생계에 가장 유효하기에 편찬한다고 밝혔다. 「전어지」는 『우해이어보』, 『자산어보』와 함께 조선의 3대 어류 전문서로 평가받고 있다. 또한 우리가 아는 동물 대부분을 다루고 있어 ‘동물백과사전’이라 할 만 하다. 다만 객관적인 동물의 모습을 담았다기보다는 인간의 생명유지에 필요한 섭생의 대상으로 다룬, 기존의 백과사전과 다른 동아시아식 백과사전이다.

권1과 2는 <목축 · 양어 · 양봉>이고 권3은 <사냥>과 <고기잡이>, 권4는 <물고기 이름 고찰>이다. 권1에서는 목축 총론과 말 기르는 법을 다룬다. 말 사육법은 중국에서 오래전부터 발달했기 때문에 대부분 중국 서적에서 정보를 취하고 있다. 『마경馬經』은 거의 전문이 「전어지」에 반영되었다. 권2에는 말을 제외한 모든 가축과 물고기와 벌이 등장한다. 가축 가운데 농우農牛에 할애한 분량이 많다. 권2에서 서유구 자신의 가축 사육법인 ‘땅광에서 기르는 법’을 언급한다는 점이 특이하다. “물고기”조에서는 양어가 생계를 꾸리는 데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내용으로 시작한다. 소 다음으로 양이 많다. “꿀벌”에서는 벌의 습성을 파악하고 양봉과정에서 생기는 여러 문제를 없애는 데 필요한 정보를 집약하고 있다. 권3은 <사냥>과 <고기잡이> 방법을 총망라한다. “매와 사냥개” 길들이는 법부터 총과 활, 그물과 함정을 준비하는 법, 어구를 준비하고 낚시하고, 작살을 사용하는 방법까지 상세히 설명한다. 이 부분에서 서유구의 『난호어목지』가 많이 인용되는데 설명만으로도 복원이 가능할 만큼 자세하다. 권4는 <물고기 이름 고찰>이 제목이다. 132종의 민물고기와 바닷물고기에 대해 설명한다. 명칭 고증, 오류 수정, 명칭의 유래, 생김새, 크기, 습성, 서식처, 주요 산지 및 나는 때, 이동 경로, 맛, 잡는 법, 용도, 효능, 선호도, 가공법, 운송로, 판로 등 어류와 관련된 다양한 측면을 다루고 있다. 관찰과 탐방, 명칭 고증을 위한 문헌 고증까지 치밀하게 수행한 저작물이다. 『자산어보』에서 다루지 않은 어구의 제작법과 이용법도 상세히 전달하고 있다. 특히 풍석이 서술한 “준치”조는 『임원경제지』 저술과정에서 그가 얼마만큼 투철한 고증과 검증, 분석과 비교 행위를 직접 수행했는지를 엿볼 수 있는 단서가 되어 준다. 「전어지」는 국어학자들에게 귀중한 연구 소재를 제공한다. 「전어지」를 편집하던 몇 년 동안에 일어난 우리말의 변화를 권4 <물고기 이름 고찰> 부분에서 여러 가지 제시해 주기 때문이다. 파주 장단에서 물고기 잡고 농사짓던 시기에 풍석은 한편으로는 『행포지』와 『난호어목지』를 짓고 한편으로는 『임원경제지』를 편집한다. 생업에 몰두하며 주경야독한 결과 조선 어류학의 발원지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전어지」는 오사카본, 고려대본, 규장각본에 모든 권이 남아 있다. 고려대본과 규장각본은 일반적으로 지적한 사항과 같아 따로 언급하지 않는다. 오사카본은 교정한 흔적이 세 군데 정도만 있어 초고에서 이미 상당히 정리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초고 상태가 완정하게 된 데에는 『난호어목지』가 일찍이 장단의 귀농기에 저술되었던 것도 한몫했으리라 생각된다. 초고가 잘 정리된 덕에 오사카본은 아예 원문 전체를 ‘자연경실장’ 괘지에 오려 붙여 만들었다. 오사카 본에서 아쉬운 점은 권4 <물고기 이름 고찰> “바닷물고기” ‘비늘 없는 종류’의 첫 부분부터 네 장(8면)이 누락되어 있다는 점이다. 누락 부분은 고려대본과 규장각본에 남아 있다. 80종의 인용문헌 가운데 『난호어목지』를 비롯해 자신의 저술로 「전어지」전체의 47.7%를 채운다.

「정조지(鼎俎志)」는 음식 요리 백과사전으로 7권 4책, 총 128,830자로 이루어졌고 『임원경제지』 전체에서 5.1%를 차지한다.

정조지

‘정조鼎俎’는 ‘솥과 도마’를 가리킨다. 풍석은 정과 조를 요리도구로 제시하면서도 제기의 의미가 있음을 알려준다. 요리의 도구가 희생 제물을 담던 제기였다는 사실을 강조하여 정조의 세계를 다른 차원으로 밀어 올린다. 「정조지」는 음식의 재료, 조리법, 효능 및 금기 등을 다룬다. 11개의 대제목을 두고 먹을거리의 가공을 통해 인간의 건강한 생활을 보장하려 했다.

그는 동아시아 삼국의 수많은 요리 재료와 갖가지 요리들을 우리 형편에 맞게 정리한다. <음식 재료 요점 정리(食鑑撮要)>에서는 식재료를 물, 곡류, 육류, 어류 등으로 나누어 본초학적 특성을 밝혀 요리에 참고하도록 했다. <익히거나 찌는 음식(炊餾之類)>에서는 밥과 떡에 대하여, <달이거나 고는 음식(煎熬之類)>에서는 죽과 조청과 엿에 대하여, <볶거나 가루내어 만든 음식(糗麵之類)>에서는 미숫가루와 국수·만두에 대하여 다루었다. <음료(飮淸之類)>에서는 탕·장·차·청량음료·달인 음료 등에 대하여, <과자(菓飣之類)>에서는 꿀과자 · 설탕과자 · 말린 과일 · 과일구이 · 약과자 · 점과 등에 대하여 다루었다. <채소 음식(咬筎之類)>에서는 김치와 같은 각종 저장성 높은 채소 요리 및 기타 다양한 채소 요리를 다루었다. <고기와 해산물(割烹之類)>에서는 주로 육류 · 조류 · 어류를 이용한 국 · 구이 · 회 · 포 · 초 · 기름 등에 대하여 다루었고, <조미료(味料之類)>에서는 소금 · 장 · 초 · 기름 등에 대하여 다루었다. <술(醞醅之類)>에서는 누룩과 술 빚기, 소주 내리기, 음주법 등 술과 관련된 다양한 내용에 대하여, <절식(節食之類)>에서는 절기별 중요 세시 음식에 대하여 다루었다. 풍석이 설명하는 흰죽 쑤는 법을 읽다보면 정성 가득한 약을 만드는 과정으로 여겨진다. 이런 죽을 먹으면 건강을 지키는 데 크게 위태롭지 않을 것이라 한다. 죽 외에도 지금은 해 먹을 줄 모르는 수많은 음식들이 풍석의 손을 통해 지면 위에 되살아난다.

「정조지」의 음식 이름은 그 음식의 재료나 조리과정을 알려준다. 채소가 들어간 국은 ‘갱羹’으로, 채소가 없는 국은 ‘확臛’으로 표기한다거나 불에 가까이 한 구이를 번燔이라 하고 불을 멀리한 구이를 자炙라고 한다거나 잘게 자른 고기를 회생膾生이라 하고 소금과 쌀을 이용해 생선살을 발효시키면 해醢라 한다. ‘장醬’과 식초로 음식의 독을 다스리는 이치에 대해 설명하고 술로 수명을 늘이고 병을 다스렸음을 알려준다. 풍석은 삶에 즐거움을 가져다주는 절식에 대해 소개하면서 「정조지」를 마치는데 일관되게 소박함과 검약함을 잃지 않은 음식들에 대한 설명하기 위해 노력한다. 교묘함을 뽐내고 재물을 낭비하여 산가山家에서 품위 있게 먹는 데 적합하지 않은 음식은 모두 수록하지 않았다고 밝힌다.

「정조지」는 2,303개의 기사로 이루어져 있고 인용문헌은 177종이다. 오사카본, 고려대본, 규장각본, 연세대본이 전한다. 규장각본은 7권 4책이 온전하게 보전되어 있지만 권4 “채소음식”에서 오사카본과 상이한 부분이 상당히 발견되었다. 특히 오사카본에 있는 자잡채煮煠菜 · 외증채煨烝菜 · 유전채油煎菜 · 소채酥菜 전체가 규장각본과 고려대본에서는 모두 누락되었으며 권6 “술” 3쪽이 누락되어 있다. 수정이나 산삭 표시도 없이 「정조지 목차」에 잡혀 있는 부분이 누락된 이유에 대해 자세히 밝혀진 것은 없으나 어떤 착오에 의해 빠진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오사카본은 편집 지시가 매우 많으며 그 지시들이 반영된 결과물이 규장각본과 고려대본임을 확인할 수 있다. 오사카본은 정리되기 전의 원고라서 어떻게 정리본으로 교정 지시가 반영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편집 지시에서 눈에 띄는 것은 권1에 청나라 석성금의 『석씨식감본초』를 인용하여 나중에 추가한 부분이 두드러지게 많다는 점이다. 고려대본은 7권 4책 가운데 2책(3·4권)과 4책(7권)만 남아 있다. 필사 용지에 자연경실장 기록이 선명하며 규장각본과 동일한 체계를 따르고 있다. 연세대본은 7권 4책이 온전하게 보관되어 있으며 오사카본의 편집 지시를 충실하게 반영하고 있다. 규장각본과 고려대본에서 누락된 권4 “채소 음식”의 자잡채 · 외증채 · 소채 부분이 수록되어 있다.

177종의 인용문헌 가운데 100회 이상 인용된 서적은 『증보산림경제』, 『본초강목』, 『거가필용』, 『명의별록』, 『옹희잡지』, 『식료본초』등이고 50회 이상 인용된 서적은『군방보』와 『식물본초』등이다. 「정조지」 전체에서 조선 문헌이 차지하는 비율은 37.4%이며 나머지는 중국과 일본 문헌이 차지한다. 「정조지」는 이전까지의 요리서가 가지고 있던 이론적 배경의 부실함을 보완해주는 탄탄한 이론적 틀을 담고 있다. 그 틀은 대부분 풍석의 저작인 『옹희잡지』에서 왔다. 각 요리의 총론 부분에서 『옹희잡지』가 보여주는 서술 방식은 고전에서 해당 음식의 문헌적 근거를 확인하고 『설문해자』 등의 자서류를 통해서 요리명의 의미를 확정하는 것이다. 자신의 평가를 포함시킨 경우도 있다. 『옹희잡지』는 「정조지」의 뼈대를 제공한 핵심 인용서적이다.

『음식디미방』은 안동 지역의 146가지 음식만을 한글로 설명한 책이고 『규합총서』는 방대한 범위를 다루지만 밥과 죽에 대해서는 소략한 설명을 남겼다. 이에 비해 「정조지」는 밥과 죽부터 영양식까지 폭넓게 다루는데 이는 저자가 밥과 죽을 처음 해 본 남성이라서가 아니라 『임원경제지』가 쉽고 비근한 내용도 전문적인 영역으로 끌어 들여 서술하는 태도를 보이기 때문에 상식 수준의 요리조차 학술적으로 설명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할아버지 서명응이 모친 곁에서 요리를 담당했고 풍석의 어머니는 이름난 요리사였으며 풍석 역시 몸소 어머니의 끼니를 봉양했기에 「정조지」에 정리된 음식은 풍석이 실제로 만들어 보고 기록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섬용지(贍用志)」는 건축 · 도구 · 일용품 백과사전으로 4권 2책, 총 99,076자로 이루어져 있으며 전체 분량에서 3.9%를 차지한다.

섬용지

‘섬용贍用’은 ‘쓰는 물건을 넉넉하게 한다’는 뜻이다. 임원에 거주하는 데 필요한 물건을 넉넉하게 쓰려면 집과 가구와 소품 일체를 제대로 만들고 활용할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 듯하다. 집 짓는 법, 건축 자재, 에너지 및 상수도 공수 도구, 주방 용기, 의복 손질 도구, 욕실 도구, 실내 인테리어 가구 및 용품, 염색 재료, 에너지 소비 도구, 교통수단, 운송 도구, 측정 도구, 공업의 실제와 공업의 이해 등으로 풀이 할 수 있는 대제목들로 이 지를 구성한다. 19세기 초반은 장인의 손길을 거쳐 소량으로 상품이 생산되던 가내수공업 시대였는데 조선은 상공업 천시 풍조로 인해 “거칠고 졸렬한” 수준의 물품만이 생산될 뿐이었다. 이에 풍석은 중국산을 수입하는 상황은 선진문물을 받아들여 온 오랜 관습으로 여겼지만 일본산까지 수입해야 할 지경이 되었다는 데 대해 수치심을 느끼노라 했다. 「섬용지」를 읽는 이에게 조선의 기술 수준에 분개하라고 권한다. 서문에서 시작된 이런 풍석의 ‘반성’은「섬용지」의 마지막 주제인 ‘공업 교육’에까지 이어진다.

「섬용지」는 16지 가운데 풍석 자신의 저술이 가장 많이 반영된 지다. 『금화경독기』에서 44.2%나 인용하여 편집했다(남아 있는『금화경독기』에는 「섬용지」에 인용된 부분이 없다). 이는 조선의 문헌에서 「섬용지」 편집에 참고할 만한 기사가 거의 없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당시의 현장에서 일하던 장인들이 글이나 그림으로 자신들의 기술을 정리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당시 장인들의 기술이 더러 수준 높은 성과를 낳았을 수도 있겠지만 풍석이 보기에는 대개 ‘거칠고 졸렬했다.’ 그런 판단이 16지 안에 「섬용지」를 편집하게 했을 것이다.

「섬용지」에는 가옥을 비롯한 여러 건축물, 그리고 주요 일용품과 배 · 수레 · 가마 등 교통수단, 흙 · 나무 · 돌 · 금속 등의 원재료 가공 등 굵직한 공산물들이 주요한 소갯거리이다. 당시에는 너무 흔해 빠져 기록할 가치가 없다고 여겼던 물건조차도 하나하나 모두 적어 놓았다. 덕분에 요즘은 보기 힘든 갈퀴, 망태기, 튀김용 국자, 바랭이, 자배기, 배자, 양치물 컵, 세숫대야 깔개, 세수치마, 민자, 빗 상자, 양탄자, 금박, 은박 등의 물품을 알 수 있다.

「섬용지」는 자연물로부터 인공물을 만들어내는 방법에 관한 책이다. 그런데 그림이 두 군데 밖에 없어 「섬용지」의 설명만으로 물품을 복원해 내기에는 한계가 있다. 「본리지」가 ‘먹을거리’, 「전공지」가 ‘입을거리’에 관한 지라면 「섬용지」는 ‘살 곳’에 관한 지이다. 앞의 두 지에는 따로 도보圖譜를 두었지만 「섬용지」는 「이용도보利用圖譜」를 구상만 하고 실제로 만들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풍석은「섬용지」를 편집하며 두 가지 방식으로 기사를 작성한다. ‘이동 곡간(搬庫)’ 이나 ‘깨진 노구솥 땜질하는 법’에 대한 해설은 매우 상세하여 실제 재현이 가능할 정도지만 몇 몇 표제어는 설명만으로는 재현이 힘들 정도로 설명이 소략하다.

「섬용지」권1은 <집 짓는 제도>, 권2는 <집 짓는 재료>, <나무하고 물 긷는 도구>, <불로 요리하는 도구>, 권3은 <복식 도구>, <몸 씻는 도구와 머리 다듬는 도구>, <방 안의 도구>, <색을 내는 도구>, 권4는 <불 때거나 밝히는 도구>, <탈 것>, <운송 기구> <도량형 도구>, <공업 총정리>로 구성되어 있다. 집 짓는 법과 관련하여 조선집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가옥에서 나오는 찌꺼기나 배설물을 거름으로 사용토록 구조적 배치에 신경 쓰라 하고, 또 한옥의 장단점에 대해서 설명한다. 이 가운데 <방 안의 도구> 항목에「이운지」에서 다룬 도구들을 중복하여 실은 부분이 있는데 풍석은 ‘일상적인 것까지 두루 싣고 있기에 중복이 문제되지 않는다’고 했다. 권1~4까지 당시의 공업 발달 수준을 한 눈에 알아 볼 수 있도록 정리한 뒤 마지막 “공업 교육”조에서 사대부도 공업 교육에 뜻을 두어야 함을 역설했다. 장인을 대우해야 하고 상업 발달이 공업 발달과 연관이 있다고 주장한다. 물품 제조 기술이 뒤떨어지면 예를 제대로 차리기 어려우며 나라의 구성원 모두 각자의 직분을 다할 수 없기 때문이다. 농법·수차 제도가 강구되지 않아 농부의 직분이 엉성하고 길쌈 도구가 갖춰지지 않아 길쌈 아낙의 직분이 엉성하니 사대부는 성인의 도를 본 받아 농·공·상에 모범을 보여야 한다는 것이다.

「섬용지」는 4종의 필사본이 전한다. 오사카본은 권3·4만 남아 있는데 결본인 권1·2는 버클리본이다. 오사카본의 편집지시와 다른 필사본을 비교해 보면 오사카본을 보완한 가장본을 토대로 고려대본이나 규장각본이 정립된 것이 분명하다. 오사카본은 완성되지 않은 원고였다. 「섬용지」에 인용한 문헌은 총 72종이며 이 가운데 풍석의 『금화경독기』와 송응성(宋應星, 1590~1650)의 『천공개물』이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한다. 일본의 상황을 보여준 『화한삼재도회』가 비중 있게 실려 당시 일본의 기술 수준이 조선보다 뛰어났음을 보여준다. 박지원의 『열하일기』에서는 중국의 우수한 기술을 본받아야 한다는 기사를 인용했고 『증보산림경제』와 『반계수록』에서는 특정 문제를 해결할 비법을 인용한다.

「보양지(葆養志)」는 건강(양생) 백과사전이다. 총 8권 3책 129,334자로 『임원경제지』 전체에서 5.1%를 차지한다.

보양지

‘보양保養’이 아닌 ‘보양葆養’을 쓴 이유에 대해선 설명하지 않았다. 다만 “내 몸에 깃든 좋은 기운을 잘 간직하여 기른다”는 뜻으로 짐작할 뿐이다. 「보양지」와 「인제지」가 『임원경제지』의 절반을 차지한다. 인체의 수양과 치료에 관련된 내용이 압도적으로 많은 점은 향휴 여러 측면에서 조명될 필요가 있겠다. 풍석이 자신의 이런 저술이 유가의 일에서 벗어나 보일까 걱정하며 서문을 지었기 때문이다.

「보양지」권1은 <총서>로 사람이 살아가며 품속에 두어야 할 긴요한 양생 원리를 설명하고, 권2는 <정 · 기 · 신>으로 몸의 생명력의 핵심인 정精과 기氣, 그리고 신神을 설명하고, 권3은 <일상생활과 음식>으로 생활 속 양생법을 다루며, 권4는 <몸 수양>을 제목으로 수련법과 도인導引, 안마, 그리고 운문 형식의 가결歌訣을 수록했다. 권5는 몸에 도움이 되는 식이와 약에 대해 <약 음식의 복용>을 제목으로 논의하고, 권6은 <부모나 노인이 건강하도록 봉양하기>를, 권7은 <출산과 육아>에 관한 내용을, 권8은 <양생월령표>라 하여 열두 달 동안의 월별 양생법을 표로 만들어놓았다.

「보양지」는 “사람의 수명은 하늘의 원기 60세, 땅의 원기 60세, 사람의 원기 60세 합하여 180세가 된다”고 주장한다. ‘양생’이 이 수명대로 살게 하는 방도인데 “삼가고 조심하는” 것이 기본이며 정기신을 지키고 이목구耳目口를 잘 다스리는 데서 시작한다고 한다. ‘마음은 즐겁게, 소화가 잘 되도록’ 양생한 후라야 약이 듣는다고 우선순위를 설정하여 「인제지」가 다음에 편집된 이유를 암시한다. 권1에 있는 “총애를 받거나 치욕을 당해도 놀람 없이 받아들이면 간목이 저절로 평안하다. 움직임과 멈춤을 경건하게 하면 심화가 저절로 안정된다. 음식에 절제가 있으면 비토가 새지 않는다. 숨을 조절하고 말수를 줄이면 폐금이 절로 온전해진다. 고요히 욕심을 줄이면 신수가 절로 충족된다”라는 문장은 「보양지」전편의 압축이라고 보아도 손색없다. 권2의 <정·기·신>에서 정을 보하고 기를 고르고 신을 아끼는 보정補精, 조기調氣, 색신嗇神의 방법에 대해서는 도가적 논리가 근간을 이룬다. 권3의 <일상생활과 음식>에서 권2의 정기신과 대조적인 신체의 겉 부분을 해부 생리적으로 설명한다. 이 부분은 『동의보감』에 인용되지 않은 『섭생요의攝生要義』에서 인용했다. 권4는 「보양지」 가운데에서 가장 어려운 부분이다. 호흡 및 몸의 움직임과 관련된 구체적 동작을 지시하거나 표현하는 글이라 글을 보고 동작을 상상하기가 어려운데다 필사의 오류까지 있어서다. 이 책에는 맨손으로 상한傷寒, 식체食滯, 심복통心腹痛, 풍비風痹 등의 35가지 질병을 치료하는 방법이 수록되어 있다. 권5는 약이 되는 음식과 재료, 도구들에 대해 설명하고 권6은 부모와 노인을 장수하게 하고 잘 봉양하는 법에 대해 기술한다. 노인은 경조사에 나가지 않고 빈객을 접대하지 않고 연회석에 나가지 않으며 늘 싱겁게 먹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약보다는 밥을 잘 먹는 것이 노인에게 좋다며 180가지의 처방을 노인 보양법으로 설명한다. 권7은 후손을 구하고 아이를 기르는 일에 관한 내용으로 남자는 서른 살에, 여자는 스무살에 결혼해야 아이가 건강하다는 구절, 가난한 집에서 아이들이 더 건강하게 잘 자란다는 구절이 눈에 띈다. 권8의 월별양생표는 「보양지」의 내용을 달력처럼 만들어 실행을 돕는 요약표로서 도인법, 일상음식, 의복, 목욕, 약 음식, 잠, 질병의 예방과 처치, 임신, 푸닥거리, 전염병 예방의 항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분량의 편중이 심하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내용도 있지만 양생 지식과 실생활의 밀접성을 보여주는 사례로서는 의의가 크다.

「보양지」는 오사카본, 규장각본, 고려대본이 모두 남아 있는데 다만 오사카본에는 권8이 누락되어 있다. 세 필사본을 비교해 볼 때 여러 가지 면에서 따져볼 단서를 많이 제공하는 사본이 오사카본이다. 오사카본에 ‘인용한 책의 제목을 고찰해 봐야 한다’거나 ‘「인제지」를 참조해야 한다’는 가필이 있는데 고려대본에 이대로 편입되어 있는 것을 볼 때 오사카본이 선행본임이 확인된다. 아쉬운 점은 오사카본에 빠진 내용이 몇 군데 더 있고 고려대본 역시 오사카본에서 지시한 대로 수정되지 않은 부분이 있어 풍석이 「보양지」의 완정본을 만들지 못한 채 마무리하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다. 그의 가운家運이 쇠락한 사정과 관련이 있는 듯하다.

「보양지」는 총 269종의 문헌을 인용해 편찬했다. 『수친양로서』와 『삼원연수서』 두 권을 가장 많이 인용했고 구할 수 있는 중국과 조선의 의약관련 서적을 다수 참조했는데 조선 문헌은 전체 분량의 13.1%에 불과하다. 조선문헌 가운데에선 정조의 주치의였던 강명길이 『동의보감』 등의 의서를 정리하고 자신의 내의원 경험방을 덧붙여『제중신편』(1799년)을 펴냈는데 풍석은 이 책을 가장 많이 「보양지」에 인용했다.

「인제지(仁濟志)」는 의학 백과사전으로 28권 14책, 총 1,111,604자이다. 『임원경제지』에서 가장 많은 44%의 분량을 차지한다.

‘인제仁濟’는 『논어』에 나오는 ‘백성에게 혜택을 널리 베풀고 어려움을 구제하는 일’을 의미한다. 풍석은 <인제지 서문>에서 점치는 자, 무당, 주술사, 음양오행가 등의 술수를 모두 인제와는 무관하다고 선을 긋는다. 사기이거나 의도가 좋다 할지라도 허공을 잡는 일일 뿐이라며 배척한다. 유가儒家답게 오직 의약만이 인제를 담당한다고 주장하는데 의학계의 옥석은 가리자고 당부한다.

「인제지」는 『동의보감』보다 더 많은 분량이며 「보양지」와 함께 양생과 예방, 치료의 두 부분에 관해 당대의 의학을 집대성했음에도 『임원경제지』 속에 묻혀 있다 보니 아직 그 존재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인제지」는 <내인>, <외인>, <내외겸인>, <부과婦科>, <유과 幼科>, <외과>, <비급備急>, <부여附餘> 등으로 구성된다.

<내인>은 권1~3에 걸쳐 “음식·술·과로에 몸이 상함”, “몸의 정기와 기혈이 허손해진 증상”, “간질”, “잠이 적은 증상”, “벙어리”, “담음痰飮”, “여러 가지 기병(諸氣)”, 등등 피와 기침, 세균 관련 증상이 나타나는 질병을 포함한다.

<외인>은 권4~6에 걸쳐 있고 “중풍”, “상한傷寒”, “산람장기山嵐瘴氣와 습병”, “피부가 마르고 깔깔해지는 증상”, “화열火熱”, “학질” “다릿병”, “온역”, “헛것에 들린 증상” 등등을 포함한다.

<내외겸인>은 권7~11에 걸쳐 있는데 “두통”, “눈병”, “귀먹음”, “코막힘”, “치아의 통증”, “목덜미와 등의 통증”, “허리와 다리의 통증”, “갑자기 토하거나 설사하는 증상”, “트림”, “설사”, “변비”, “기침”, “부종”, “당뇨” 등등을 다룬다.

권12는 <부과>, 권13~15는 <유과>를, 권16~21은 외과 질병을 논하고 권22·23은 구급의학을 다룬다. 그 다음은 모두 부록에 해당한다. 권24·25는 “약 만들기”와 침구법, 의료기구를 논하고 있다. 권27은 본문 처방 색인에 해당하는 “탕액 이름을 운으로 찾기(湯液韻彙)”를 실었고 마지막 권28은 “구황救荒” 편이다.

질병의 각론에서는 질병의 원인과 증상, 치료법, 사후 조리의 형식으로 설명함으로써 실제 질병을 치료할 때 신속하게 찾을 수 있도록 배려했다. 『동의보감』이 병리보다 생리를 근본으로 내세워 내경, 외형, 잡병 편제로 구성되어 있는 데 비해, 「인제지」의 내인, 외인, 내외겸인 구성은 좀 더 실용적이면서 파격적이다. “궁벽한 시골에서 책이 부족하니 『삼인방』의 목차를 따라 찾아보기 쉽고 질병 치료에 적용하기 유리하도록 구성했다”고 서문에 밝힌다. 또 「인제지」가 『본초강목』의 보완역할을 하길 바란다는 구절도 있다. 분량이 많아 각 권마다 실린 내용을 이 지면에 모두 요약하기는 어렵다.

다만 ‘탕액운휘’ 부분은 일종의 색인인데 「인제지」에서 가장 특징적인 부분 가운데 하나라 부연한다. 지금의 사전에 해당하는 운서韻書의 순서대로 4,799가지의 처방을 색인 처리해 놓았다. 탕湯, 산散, 단丹, 환丸, 전煎, 원元, 음飮, 고膏 등의 처방 제형에 따라 따로 분류해 두었고 또 같은 이름의 처방이 질병 항목에 따라 달리 나오는 경우 일일이 그 해당 편명을 표기해 두었다. 이름이 같아도 내용이 다르면 별개의 독립 처방으로 보고, 각각의 질병 편명을 일일이 들어 전체 용도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게 했다. 오로지 기억과 수작업에 의존해서 이런 성과를 이룬 점을 상기해 보면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일본인 미키 사카에三木榮가 그의 『조선의서지朝鮮醫書誌』에서 “홀로 이루어낸 그 노작에 존경의 마음을 금할 수 없다”는 표현을 남겼는데 동감하지 않을 수 없다. 마지막으로 “구황” 분야에는 어려운 시기를 미리 대비하는 방법에 대한 역사적 고찰로서 ‘미리 대비하는 일에 대한 총론’, 제도의 장단점을 따져보는 ‘구휼 시에는 일정한 값으로 빌려주고 돌려 받는다’, 기아를 견딜 수 있게 하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서 ‘벽곡에 대한 총론’, 그리고 ‘기근의 구제에 대한 총론’으로 내용이 채워져 있다. 실로 의료와 삶이라는 인간 생활의 전반이 모두 망라된 대단원이라 할 수 있다.

「인제지」는 권수와 대제목, 소제목 모든 항목에서 다른 지에 앞선다. 분량이 많고 인용문헌도 878개나 되며 기사의 수만 해도 25,753개에 이른다. 『임원경제지』의 전체 인용문헌으로 수록된 852종보다 더 많은 문헌을 인용했다. 의약과 관련된 무수히 많은 문헌을 인용하면서도 “채취하는 시기”를 정리할 때에는 우리나라에서 쓰이는 동식물 약재와 식재에 관해 집중적으로 자신의 지식을 풀어 보인다. 「인제지」 전체에서 서유구 저술 이외의 조선문헌은 2.9%, 서유구 자신의 저술은 8.1%를 차지해서 11.7%가 조선문헌이지만 중국 문헌을 인용해 조선 문헌이 만들어진 경우가 있기 때문에 논란의 여지는 남는다. 「인제지」는 고려대본과 규장각본이 남아 있다. 오사카본에는 없다. 인용의 정확도는 떨어진다. 고려대본과 규장각본 가운데 고려대본의 정확도가 압도적이었다. 두 판본의 글자가 다른 경우 원출전과 비교해보면 거의 995 고려대본이 맞았다. 고려대본이 필사본 가운데 가장 선본善本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된다. 풍석은 『동의보감』 기록으로 「인제지」의 본기사를 보강하거나 부연하고, 『동의보감』에 기록이 없으면 새로 추가하고 『동의보감』의 기록에 잘못이 있으면 교정했다. 그리고 「인제지」의 단방 처방은 『동의보감』의 처방에 『본초강목』의 처방을 추가한 경우가 많다. 비록 「인제지」에 실린 정보가 엄격하게 과학적인 설명을 담지하고 있지는 못하다 하나 오랜 임상 관찰을 거쳐 얻어진 정보이며 동아시아에서 오랜 기간에 걸쳐 축적된 정보라는 점에서 가치가 있기에 천연물 신약 개발에 이용할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향례지(鄕禮志)」는 의례 백과사전으로 5권 2책, 86,930자, 3.4% 비율로 간추릴 수 있다. 향촌에 사는 선비라면 반드시 알아야 하는 지역 공동체 관련 예법인 향음주례와 향사례, 관혼상제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향례지

‘향례鄕禮’는 ‘향촌에서 시행하는 의례’라는 뜻이다. 본래 ‘향鄕’은 왕성 안에 있는 백성들의 거주지라는 뜻이었는데 후대에는 외진 고을을 뜻하게 되었다고 풍석은 설명한다. 따라서 왕성에서 떨어진 곳에서 시행하기에 편한 의례를 담았다고 했다. 「향례지」내용은 서유구가 정조 통치기에 규장각에서 편찬 사업을 하던 이력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정조가 서울과 지방의 향음鄕飮의 예를 바로 세우고자 역대의 향음 의식을 책으로 만들게 할 때 향약鄕約을 포함시키라는 상소가 올라왔고 풍석이 『향례합편鄕禮合編』을 편찬하면서 이전 자료를 참고해 지금 시대에 맞게 새로 의례를 만들어서 정조에게 바쳤다고 밝혔다. 당시 정조는 풍석이 제안한 새로운 예법 대로 시행하길 거절하였고 이런 저간의 사정을 풍석은 『금화집』에 기록한 뒤 이를「향례지」에서 재인용한다. 『향례합편』은 총3권이고 「향례지」는 5권이다. 옮기는 과정에서 일부는 빼고 일부는 다른 책에서 추가했다. 『향례합편』에서는 관 · 혼만 다루었지만 「향례지」에는 상 · 제까지 보완하여 명실상부한 ‘향례’를 갖추었다.

「향례지」권1은 <통편>으로 “향음주례”를 먼저 다룬다. 주 · 당 · 송 · 명 · 조선의 향음주례를 포괄하고 풍석이 정리한 ‘새로 정한 향음주례’로 마무리한다. 향음주례는 고을 수령이 주관하여 향촌의 선비나 유생들이 향교나 서원 등에 모여 술을 마시며 잔치를 하는 향촌 의례이다. 이 때 학덕과 연륜이 높은 이를 주빈으로 모시고 그 다음가는 사람을 개介로 삼고 그 다음가는 유생을 중빈衆賓으로 초대한다. 이어지는 여러 규칙이 있는데 시대에 따라 조금씩 변형되었고 조선에서도 변형이 일어났기에 풍석은 윗대의 24단계의 절차를 11단계의 절차로 바꿔 시행토록 제안한다. 향음주례는 단순히 먹고 노는 행사가 아니라 한 나라의 질서 유지를 염두에 둔 자리였기에 절차가 필요했었다. 권2는 <통례> 가운데 “향사례”를 소개한다. 향사례는 봄·가을 두 계절에 백성을 모아 활쏘기를 하며 예와 악을 익히게 하는 행사다. 주나라 향사례는 52단계이나 풍석은 16단계로 간소화하고 매년 2회 시행하던 규정을 늦봄 1회 시행으로 개정한다. 권3은 <통례> 세 번째로 향약을 다룬다. 마을의 자치규약인 향악은 덕업상권, 과실상규, 예속상교, 환난상휼의 네 강목을 지키자는 운동인데 조선 중종 이후 김안국이 『여씨향약』을 배포한 이후 전국에 보급되기 시작하고 율곡이 지은 ‘사창계의 약속’이 실생활에 적용한 사례를 보여주어 풍석이 이를 인용해 운영 방침 등을 제안한다. 권4 · 5는 의례인 관혼상제를 소개한다. 권4에서 관례冠禮와 계례笄禮, 혼례의 절차와 기준이 되는 나이 등을 제시하고 권5에서 상례喪禮와 제례祭禮를 다룬다. 권5가 내용으로나 기사 수로나 가장 복잡하다. 그 만큼 절차가 복잡함을 알 수 있다. 특히 상례는 「향례지」 전체의 30.6%를 차지할 만큼 비중이 크다. 총 19단계의 절차를 제안하는데 이 절차는 조선의 예학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던 『가례』의 내용을 본줄기로 삼고 이를 주석한 여러 예학서를 인용해 구성했다. 조선은 ‘기해예송’과 ‘갑인예송’ 논쟁으로 정권이 바뀔 만큼 상례에 대한 논쟁이 많았는데 풍석은 『상례비요喪禮備要』를 인용해 「향례지」 권5의 상례 부분을 편찬한다. 풍석은 처음 「향례지」를 ‘상례’로만 한 권을 구성할 계획이었던 것 같다. 오사카본을 보면 상례에서 장이 끝나고 ‘제례’에서 새로운 권을 명기해 놓았는데 나중에 상례와 제례를 이어 붙여 한 권으로 묶은 듯하다. 제례의 양이 많이 않았기 때문이다.

풍석은 「향례지」에 향음주례, 향사례, 향약, 관혼상제를 실어 가정과 마을 공동체의 화목과 질서를 만들려 노력했다. 개인주의가 시대정신이 된 지금 시대에 풍석의 이런 저작물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의례는 의식주가 갖춰진 이후에나 생각할 수 있는 문화이다. 19세기 풍석의 시대와 비교할 때 지금 우리는 더 가난해진 것은 아닌지 의구심이 든다. 「향례지」는 16지 가운데 가장 체제가 간단하다. 소제목, 표제어, 기사의 수가 적은데 이는 향례의 대강이 풍석의 머릿속에 정리되어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현존하는 필사본은 오사카본, 규장각본, 고려대본이다. 오사카본 「향례지」의 권두 부분은 초기 편집 체제와 뒷날 확정한 편집 체제를 동시에 보여준다. 권1~4까지 교정 지시가 거의 없다. 옮겨 왔기 때문이다. 권5는 처음 정리한 부분이라 보충 · 삭제 · 추가 · 이동 지시가 여러 곳에 있다. 「향례지」오사카본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전권의 서체가 동일하다는 점이다. 심지어 권5의 교정 지시 서체도 대부분 같아 보이는데 자신의 견해를 쓴 ‘안설’ 부분까지 같은 것으로 보아 이 책은 풍석 자신이 전부 쓴 것으로 판단된다. 만약 이 오사카본 「향례지」를 풍석이 직접 필사했다면 그 이유가 무엇일까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향례지」에 인용된 문헌은 총 21종이다. 『상례비요』가 가장 많고 『가례』가 그 다음이다. 인용한 풍석 자신의 저술은 『풍석집』이 유일하다.

「유예지(遊藝志)」는 교양 백과사전으로 6권 3책, 88,166자이며 전체 『임원경제지』 안에서 3.6%를 차지한다.

유예지

‘유예’는 “예에서 노닌다(遊於藝)”는 의미로 『예기』와 공자의 말에서 따왔다. ‘예’는 ‘기능’이며 선비가 배워야 하는 예(禮), 악(樂), 사(射), 어(御), 서(書), 수(數)를 의미한다. 그 가운데 오랜 시간을 들여야 배울 수 있는 독서와 활쏘기, 수학 및 글씨와 그림과 실내악에 대해서만 설명한다. “예와 악의 조목이 매우 번잡해서 갑자기 익힐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고 대악(大樂)은 사라지거나 변형되어서 되살릴 수 없기 때문”이다. 풍석의 시대에는 수레 모는 법에 대해 익힐 수 없었다. 그리고 글씨쓰기(書)는 육서(六書)를 가르치는 것인데 이를 갑자기 익힐 수는 없어서 글씨와 그림으로 대신한다고 했다. 이렇게 시골 생활에 필요하거나 실행 가능한 것만을 취사선택해 구성함으로써 실용성에 초점을 맞춘 『임원경제지』의 편찬의도를 드러낸다.

「유예지」 권1은 ‘독서법’과 ‘활쏘는 법’에 대해 설명한다. 공부에 입문하는 초학자에게 자세를 바르게 하는 법부터 내용을 이해하고 배운 바를 몸으로 실천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한다고 가르친다. 내용에 따라 읽는 법을 달리해야 하며 경서와 역사서는 읽는 순서를 안내한다. 나이에 따라 단계별로 읽도록 권유하는데 이런 내용은 주희의 『주자독서법』 등의 책을 인용하여 알려준다. ‘활쏘는 법’도 이와 같이 자세하게, 단계별로 주의할 점과 고려할 점을 설명하면서 활쏘기를 살상 방법이 아닌 선비의 수양도구로 안내한다. 활을 만들고 보관하는 방법까지 배우면 도구에 끌려 다니지 않고 도구를 장악할 수 있다. ‘향거양지’인은 전체를 관통하는 맥락을 스스로 좌지우지할 수 있느냐의 여부로 결정되고 그런 사람을 목표로 이 책을 편찬하였을 것으로 생각한다.

권2는 수학에 대해 다룬다. 이 부분을 번역한 장우석 교사는 “실용을 중시한 단원 구성과 계산 알고리즘을 통한 문제해결, 그리고 현상으로부터 개념화 과정의 세 가지 측면에서 「유예지」권2는 현상-본체, 실용-개념 일원론적인 철학을 잘 구현”했다고 평가한다. 방전법(토지 넓이 구하기), 속포법(물건의 양과 거래시 가격 계산하기), 쇠분법(물건의 가격·세금에 차등을 두어 계산하기), 소광법(화살 묶음의 개수와 토지의 넓이 구하기), 상공법(거리의 원근과 용역 비용 구하기), 균수법(물건의 가격과 각종 비용 구하기), 영육법(사람 수와 물건의 가격 구하기), 방정법(물건의 개수와 가격 구하기), 구고팔선(피타고라스 정리, 삼각형의 성질을 이용한 도형 문제 해결하기, 삼각함수의 정의), 이 아홉 가지를 구장(九章)이라 한다. 구장 앞에 삼재(三才, 천문·도량형·길이와 넓이)를 배우면서 단위 환산, 구구단, 사칙연산법, 제곱근과 세제곱근 구하기, 비례식 이용하여 구하기(四律比例)를 익힌다. 이런 계산법은 땅의 넓이를 구하거나 세금을 매기거나 건물을 지을 때 필요하니 향촌에 거주하는 사대부라면 당연히 알고 있어야 한다. 「유예지」에 나오는 수학에는 중국수학 개념과 더불어 서양수학의 개념이 정리되어 있다.

권3의 주제는 ‘글씨’로 서도의 요체와 기초부터 응용까지의 과정을 정리한다. 여러 서체의 역사에서부터 배우는 법에 이르기까지 구체적인 팁을 제시하며 글씨와 정신적 교감을 이루어내야 한다고 강조한다. 문방사우의 사용법과 잘못 쓴 글씨를 지우는 약 제조법도 알려준다. 권4와 5는 ‘그림’에 대해 다루고 권 6은 실내악의 악보를 직접 정리해 두어 산림에 거주하는 선비의 예술적 일상이 어떠했을 지에 대한 구체적인 실상을 전해준다. 19세기의 조선 양반가에 이어져 온 예술 문화의 정수가 이 책에 기록되어 있다. 「유예지」에는 82종의 인용문헌이 소개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 서명응의 『고사십이집攷事十二集』이 권2 수학 부분에 전재되어 있다는 점과 ‘방중악보’에 인용문헌이 없다는 점이 특징이다. 자신이 연주하던 음악의 악보를 직접 그렸기 때문에 인용문헌을 기록하지 않았으리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이운지(怡雲志)』는 문화예술 백과사전으로 8권 4책, 185,418자, 전체에서 7.3%를 차지하며 인제지 다음으로 분량이 많다.

이운지

‘이운(怡雲)’은 중국 양나라 도홍경(陶弘景, 458-536)의 시구에서 따온 말로 ‘구름을 혼자 즐긴다’는 뜻을 담고 있다. ‘이운지서문’은 벼슬, 권력, 문장력을 구하는 자들에게는 상제가 가능하다고 하면서 “임원에서 고상하게 수양하면서 세상에서 구하는 것이 없이 한 몸을 마치고 싶다”는 자에게는 불가능하니 다른 소원을 말하라고 하는 일화로 시작한다. 임원에서 청복을 누리는 일은 은자의 특권이나 세상과 단절하고 사는 은자를 장려하기 위함이 아니라 시골에 살면서 한적하게 삶을 즐기는 일, 이것을 「이운지」에서 다루었다고 밝힌다.

「이운지」는 10개의 대제목, 각 대제목 아래 많은 표제어를 두고 기사를 정리한다. <은거지의 배치>, <휴식에 필요한 도구>, <임원에서 함께 하는 맑은 벗들>, <서재의 고상한 벗들>, <골동품과 예술 작품 감상>, <책 소장하기>, <명승지 여행>, <시문과 술을 즐기는 잔치>, <명절의 구경거리와 즐거운 놀이> 순으로 가족 · 이웃과 긴밀한 유대관계를 맺으며 살 수 있는 방도를 제시한다. 풍석은 권1~권7까지 집터 잡고 정원 안에 연못 만들고 나무 심고, 화단 꾸미는 법 등을 독창적인 아이디어라면서 그림과 함께 설명한다. 지금은 상상하기 힘든 금(琴) 연주실, 향나무로 만든 정자, 이동식 정자를 짓는 법 등을 소개하는데 서술 과정이 자세하고 폭넓은 분야를 아우르고 있기 때문에 현대인들이 읽어도 놀라움을 금할 수 없는 내용이 많다. 연못가의 정자에서 금을 연주할 때는 물고기가 수면위로 뛰어 오르도록 먹이를 주어 훈련시키라고 귀띔한다. 연못을 조성하는 방법에 대해 설명하는 대목을 읽으면 정말 만들어보고 싶어진다. 가축농장과 양어장, 가을걷이 감독 누각, 누에방, 길쌈방, 채소밭 정자, 놀잇배 등을 제안하면서 각각의 용도에 맞는 건축법, 건축물 간의 실용적 동선, 실내 공간의 배치는 물론 공간의 운영 관리법까지 세세히 적었다. 이런 모든 공간을 사대부가 다 소유할 수는 없다.

그 역시 말년에 번계(樊溪, 지금의 서울 번동 부근) 산장으로 이사한 뒤 그 곳에서 자신이 구상한 건물을 갖추려는 시도를 하기도 했으나 모두 짓지는 못했다. 자연경실(自然輕室, 서재), 자이열재(自怡悅齋, 기거공간), 거연정(居然亭, 정자), 광여루(曠如樓, 농사 독려하는 누각), 오여루(奧如樓), 휴식하는 누각 등 다섯 건물을 지었다고 한다. 자연경실은 서재로 오사카 본 원고의 생산지이기도 하다. 모든 건물을 짓기 보다는 자신의 처지에 맞게 가감하라는 의도로 집에 들어 앉을 수 있는 건축물을 모두 소개한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이외에 그릇, 음주도구, 평상, 의자, 침구류, 병풍과 휘장, 차 문화 관련 도구, 향, 금琴과 검, 괴석, 새, 사슴, 물고기, 문방사우, 골동품, 책에 대해서 설명하기 위해 중국과 자신의 저술 여러 권을 인용하기도 한다.

「이운지」 권8은 ‘일상 즐기기’, ‘명승지 여행’, ‘시문과 술을 즐기는 잔치’, ‘명절의 구경거리와 즐거운 놀이’에 대해 다룬다. 이런 설명으로 풍석은 ‘향거양지’인이 가족과 함께 행복하게 놀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데 필요한 조건들을 나열한 셈이다. 집과 부속건물과 정원 같은 물리적 공간에 덧붙여 그 공간을 채울 가구와 기물까지 정리하고 그런 물건을 사용하는 사람의 마음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독자가 알아주기를 바랐을 듯하다. 한 사람의 인간으로 살아가는 데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물적 토대가 이러하다면 그 사이 사이 맞물려 들어가야 할 정신적인 영역은 또 어떠할까? 대제목을 나누는 작업에서부터 표제어의 내용을 채우는 데까지 미친 서유구의 40여년에 걸친 작업 과정은 세계를 바라보는 그의 안목을 알려줌과 동시에 당시의 주거문화 발달의 정도를 알게 해 주는 중요한 사료이다.

「이운지」는 현재 오사카본, 규장각본, 고려대본 이외에 국립중앙도서관본이 있다. 오사카본과 국립도서관본은 빠진 부분이 있고 국립도서관 본에는 필사 시기를 알려주는 주가 붙어 있어 규장각본이 1934년 7월 이전에 필사가 끝났음을 알게 해 준다. 「이운지」에 인용한 문헌은 총 216종이다. 이 가운데 『준생팔전』, 『금화경독기』, 『동천청록』, 『금석사』 등은 40회 이상 인용되었고 『동의보감』, 『동국문헌비고』, 『악학궤범』 등은 1~2회 인용되는 데 그쳤다.

「상택지(相宅志)」는 풍수 백과사전으로 2권 1책, 총 41,451자의 분량이며 『임원경제지』 전체에서 1.6%를 차지한다.

상택지

‘상택’은 살 곳(宅)을 살핀다(相)는 뜻이다. 이 ‘상’은 술수가들이 말하는 향배(앞과 뒤)와 순역(순리와 역리)의 형국을 판단한다거나 오행과 육기(六氣)의 운행을 살핀다는 의미가 아니라 군자라면 술수를 멀리하고 환경의 한난(寒暖), 좋은 물의 유무 정도만 살피라고 한다. 풍수란 인간의 선택이 상식적인 감각에서 시작해야한다는 것.

권1은 ‘집터 살피기’와 ‘집 가꾸기’, 두 가지를 다룬다. ‘집터 살피기’에서는 지리적 조건, 생업 조건, 인심, 산수를 살펴 살 곳을 고르고 지리적 조건, 물과 흙, 생업 조건, 좋은 마을 찾기, 경치 좋은 곳, 피해야 할 곳에 대해 안다면 좋은 집터를 고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 듯하다. 산이나 가옥, 들판이나 나무, 시내에도 좋고 나쁨이 있고 텃밭, 논밭, 시냇물, 산봉우리, 민가가 주변에 있어야 하며 산·물·바람·습도·방향 등의 자연 조건을 지혜롭게 살피라고 한다. “사람은 양기를 받아 살아가므로 하늘과 해가 잘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절대 살면 안 된다”는 그의 조언은 복잡한 현대의 공간구조 안에서는 받아들이기 힘들다. “가장 기피해야 할 곳은 사방의 산이 높아 주위를 압도하는 곳이다. 해는 늦게 떠서 일찍 지고 북두칠성이 보이지 않기도 한다. 신령한 햇빛이 적으니 음기가 쉽게 올라온다”는 그의 설명에는 누구나 공감하지만 고층빌딩의 숲에서 살아가는 요즈음의 직장인들은 일부러 이런 산골을 찾아 전원주택을 짓기도 한다. 읽다보면 시대에 따라 달라진 주거지에 대한 선호도를 풍석의 「상택지」를 참고해 비교하고 싶어진다. 또 팔도의 유명한 약수터를 소개하고 풍토병인 장기(瘴氣)가 있는 지역을 알려준다. 농사와 장사, 이 두 가지 생업조건을 고려하여 주거지를 찾아야 하고, 인심 좋은 마을과 그렇지 않은 마을을 찾는 방법이 있으며 별장을 지을 때도 생업 조건을 고려해야 한다는 주장을 편다. 팔도의 풍속에 대해 논하고 대장간, 종교 시설, 황폐한 곳, 논, 전쟁터를 피하라고 권한다. ‘집 가꾸기’에서는 황무지 개간, 나무 심기, 건물 짓기와 배치, 우물, 못, 도랑을 다루는데 「이운지」나 「섬용지」에서 언급한 내용과 연결되는 부분과 상호 참조해 읽으면 참고가 된다.

권2는 ‘전국의 명당’을 다룬다. 조선 팔도의 산하를 산 · 내 · 강 · 바다로 연결 지어 주요 읍들을 개괄하고, 입지 조건, 경제 환경, 교통 환경, 지역적 특성, 배출 인물, 주거 가능성 여부를 알려준다. 각 도별로 특성이 비교적 두드러져 당대에 인식되고 있는 해당 도에 대한 인식을 엿볼 귀한 자료이다. 이 부분은 이중환의 『택리지』를 인용해 설명한다. 경기도와 충청도에 명당이 많다고 하는데 이는 실제로 명당이라기보다는 벼슬살이하는 사대부가 발탁이 되었을 때 곧장 관직을 맡을 수 있는 여건이 가장 좋기 때문인 것 같다. 이 부분의 서술을 통해 18~19세기부터 서울로 인구가 집중되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명당 소개에는 성해응의 『명오지名塢志』와 풍석 자신의 『금화경독기』를 인용한다. 풍석은 강 · 계곡 · 산골 · 호수 · 바다 근처의 거주지 가운데 좋은 곳들을 따로 품평을 하는데 명산은 유람지일 뿐 영구히 살 곳은 아니라 하고 바다 근처는 질병과 뱀 등을 들어 명당으로 부적절하다고 한다. 더구나 서해나 남해는 왜국와 중국 어선을 거론하면서 이들이 닿지 않는 대부도와 강화도가 섬으로는 으뜸이라고 한다. ‘전국의 명당’ 부분을 설명한 풍석을 통해 19세기 조선의 산하와 물산의 유통, 그리고 인심을 오롯이 알게 된다.

20세기 들어와 변형된 대한민국의 산하는 「상택지」의 산하가 아니다. 아이러니 한 일은 군사분계선 안에 갇힌 풍석의 고향 파주 장단만은 온전히 원형을 유지하고 있으리라는 점이다. 비록 접근할 수 없지만 풍석과 서명응, 서호수 등의 묘역이 그대로 남아 오늘 우리에게 풍석의 역사성을 긴장감 있게 전하고 있다. 「상택지」는 오사카본, 규장각본, 고려대본에 전 권이 소장되어 있다. 이 가운데 오사카본의 내용은 나머지 두 본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오사카본은 그 판심에 모두 ‘자연경실장’이 적혀 있고 그 내용이 그대로 다른 본에 필사되어 있으며 완전하게 정리 되어 있어서 최종본을 편집한 상황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풍석이 「상택지」에 인용한 문헌은 39종이다. 『명오지』, 『금화경독기』, 『필역가거지』, 『거가필용』, 『증보산림경제』 등은 40회 이상 인용했고 『금화지비집』, 『위사』, 『산림경제』, 『한정록』 등은 1회만 인용했다. 조선의 산하를 다루었기에 중국문헌을 많이 활용하지 않았고 문집에 수록된 기행문 형식의 글을 자주 인용했다는 점이 이 지의 특성이다.

「예규지(倪圭志)」는 생활경제, 즉 상업 백과서전으로, 5권 2책, 총 76,335자이며 『임원경제지』 전체에서 3.0%를 차지한다.

예규지

‘예규’는 ‘백규(白圭)의 상술을 곁눈질한다(倪)“는 뜻이다. 백규는 중국 전국시대 위나라 사람으로 시세 차익을 이용해 재물을 모았다. 음식을 소박하게 먹고, 욕구를 절제하고, 의복을 아꼈으며 하인들과도 고락을 함께 했다. 풍석은 백규가 실행한 가계 경영과 경제관을 높이 산 것 같다. 당시의 유학자는 시세차를 이용해 이익을 남기는 상행위를 경계했다. 『맹자』에 농단(壟斷)이라는 언덕에 올라가 주변 시장을 둘러보고 시세를 조종하여 이익을 독점한 사람을 ‘천장부(賤丈夫)’라고 비판한다. ‘농단’이 유래한 고사다. 그런데 백규를 엿본다는 뜻의 제목을 달았으니 유자들이 이해할 수 있었을까?

풍석은 사마천(司馬遷)의 “가난을 유지하며 인의를 말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길 만하다”는 말을 인용하며 “식량과 재물을 구하는 방법은 본래 군자가 취하지 않는 일이면서도 군자가 버리지 않는 일이다”라고 못을 박는다. 군자는 도 닦는 일이 우선이지만 도만 닦을 처지가 못 되는 상황에서는 중용을 중시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장사가 필요하면 장사를 하라. 이것이 풍석이 하고 싶은 말이다. 순임금이 여덟 가지 정사 가운데 먹을거리와 재물을 마련하는 일이 급선무라고 했듯이 풍석 역시 처자식이 굶주리고 있는데 성리(性理)만을 이야기해선 안 된다는 목소리를 내고 싶어 한 듯하다. 이런 상황에서도 장사를 하지 않으면 사대부가 아니며 생계가 절박할 때는 몸을 움직여 먹을거리를 얻거나 돈을 벌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다만 유학자이다 보니 농사가 근본이고 장사는 말단이라는 것. 그는 이런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장사에 필요한 지리적 지식을 정리해준다. 도시와 도시, 시장과 시장, 도시와 시장 사이의 거리를 표로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실질적인 정보를 제공했다. 그러나 풍석 자신이 장사를 했다는 기록은 없다.

「예규지」의 권1은 ‘지출의 조절’에 대한 내용이다. “수입을 고려하여 지출한다”, “절약”, “경계할 일”, “미리 준비하기”로 구성되어 있으며 경제 생활의 핵심이 정리되었다. 절약과 검소가 책 전체에 스며있다. 이 틀 안에서 부자는 부유한대로, 빈자는 가난한 대로 적절하게, 인색함으로 흐르지 않도록 중도에 맞게 처신하라고 권하다. 원리를 설명하는 세부 지침이 자세하다. 특히 절약과 검소가 장수로 이어진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논거들이 훌륭한 웰빙 지침서이다. 밥과 옷을 마련하게 해 준 농부의 수고를 생각하며 먹고, 배부르게 먹지 말고, 고기를 두 가지 이상 먹지 말고, 고기로만 배 채우지 말고, 오곡밥을 먹으라고 한다. 돈을 모으려면 낭비를 줄이는 데 힘써야 하는데 세금은 제대로 내고, 새어 나가는 재산을 막으라고 한다. 화재나 절도로 재산이 하루아침에 거덜나게 되니 재산이 많은 집은 평소 덕을 쌓아두라고 한다. 저당 잡히지 말고 임대로 살지 말고 놈팡이를 먹여주지 말라는 주장은 지금도 유효하다.

권2에서 ‘재산증식’ 방법으로 제시하는 가장 중요한 방법은 부동산 매매다. 그 다음은 유통업. 상인은 공정과 성실, 정직이라는 덕목을 가져야 한다. 재테크 방법으로 돈을 빌려 주었거든 고리대금을 피하고 과다한 금액을 빌려주지 말라고 한다. 소작인과 종을 대우하는 방법도 설명한다. 원망이 없게 처리하는 처세술이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권3은 ‘전국의 생산물’에 대해 설명함으로써 시세차익뿐만 아니라 공간을 달리해 이익을 남기는 방법을 알려 준다. 권4는 ‘재산증식’의 세 번째 주제로 ‘전국의 시장’을 소개한다. 장날, 읍내에서 장터까지의 거리, 거래 물품 목록을 일일이 정리해 경기, 충청, 전라, 경상, 강원, 황해, 평안, 함경도의 311곳 주군(州郡)에서 개장되는 시장 1,046곳을 소개했다. 권5는 ‘전국 거리표’로 권 전체가 표로 이루어져 있다. 서울에서 가장 먼 곳까지의 거리를 전국의 주요 간선과 지선을 연결하여 리(里)수로 표기했다. 서울이 시점이고 의주·서수라(경흥)·평해·부산·태백산·통영·강화 등 일곱 곳이 종점이다. 이를 통해 전국의 장시까지 가는 시간을 예측할 수 있다. 「예규지」 서문에 “재화를 증식하려는 자들이 기일에 맞춰 거래를 하고 여정을 계산하여 통행하기를 바라서이다”라는 문장이 있어 풍석의 의도를 알 수 있다.

「예규지」는 오사카본, 규장각본, 고려대본이 모두 있는데 오사카본만 권5가 없다. 인용문헌은 총 22종이다. 『금화경독기』를 가장 많이 인용했고 『인사통』, 『원씨세범』 등을 다음으로 자주 인용했다. 『열하일기』, 『북학의』, 『성호사설』 등도 1~2회 인용하였다. 경제의 전반적인 원론에서는 중국 문헌을 많이 활용했지만 조선에서 재화의 교역과 관리에 대한 실제 내용은 당연히 조선문헌을 인용했다. 권4와 5는 그가 수집한 자료를 토대로 서술되었는데 권5의 ‘전국 거리표’는 그의 말년에 추가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