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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천천히 가게 하는 방법 - 이억순

작성자
온유한
작성일
2014-05-30 16:18
조회
4947
<차를 마시며 즐기는 청담> - 문화저널 21, 이억순 중앙일보 논설위원, 세계일보사 주필

태초에 시간은 공간과 함께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른바 우주의 빅뱅설에서 나온 이야기다. 그후로 시간은 끊임없이 흘러서 내가 서 있는 오늘에 당도했다. 그리고 시간은 또 영원을 향해서 한없이 흘러간다. 왔다가 가는 흐름, 그것이 시간의 속성인가 싶다. 그렇다면 이런 비유도 가능하지 않을까. 공간이 육체라면 시간은 영혼이라고.

시간의 빠름에 대해서는 옛사람들은 이미 여러 형태로 술회한 바 있다. 물처럼 흐른다느니, 화살처럼 지나간다느니. 나이 들어서 보니 과연 옛 사람들이 한 말 그대로 시간은 빠르다 못해 번개처럼 사라져간다. 심하게 말하면 몇 밤을 자고 났더니 성큼 나이 70이 된 것 같은 느낌이다. 이를 두고 어떤 사람은 시간의 속도는 나이 먹은 만큼 빠르다고 재치 있게 말한다.

예컨대 10대는 10킬로미터로, 30대는 30킬로미터로, 70대는 70킬로미터의 속도로 시간이 흘러간다는 것이다. 그럴싸한 비유다. 어릴 적에는 시간이 너무나 느리게 가는 바람에 학년이 시작되는 봄에 벌써 여름이 빨리 오지 않는다고 발을 구르곤 했었는데 나이가 들수록 시간이 빨리 간다는 것을 절감한다.

누가 내게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시간을 천천히 가게 하는 방법이 있는데, 그것은 자주 이사를 다니는 것이란다. 이사를 다니면 낯선 환경에 적응하느라 시간이 천천히 흘러간다는 것이다. 그럴 법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최근에 나는 인터넷에서 흥미 있는 기사를 보았다. 나이가 들수록 시간이 빨리 가는 것은 뇌의 특정한 부분의 인지작용 때문이라는 것이다. 과학적인 연구결과에 따르면 보통 18세까지는 시간이 천천히 간다. 이 무렵에는 세상만물의 이치를 보는대로 흡수하는 시기여서 호기심을 가지고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자신이 살아가야 할 세상의 모든 정보를 스펀지처럼 빨아들이는 시기라서 시간이 아주 천천히 간다는 것.

그러면 왜 나처럼 나이가 든 사람에겐 시간이 엄청 빠르게 지나가는 것일까. 그것에 대한 답은 더 이상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없어 이 나이에 보는 세상만물은 이미 예전에 다 보았던 것으로 뇌가 인식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한번 본 그림책을 두 번 째 볼 때는 얼른얼른 넘겨보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이야기다. 나이 들어서 보는 세계는 어릴 적 본 세계의 되풀이로 보는 뇌의 인지작용 때문이라니. 그래서 세상만사가 시들해 보인다는 말 같다. 이 풀이 또한 그럴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보면 나는 세상에 호기심을 잃어버린 지 퍽 오래된 듯싶다. 누가 무슨 이야기를 해도 내가 이미 경험했거니 싶은, 그렇고 그런 다 아는 이야기로 들린다. 정권이 바뀌어도, 고흐 그림전이 열려도 별 흥미가 동하지 않는다. 그러니 시간이 나를 외면하고 재빨리 지나가버리는 것인가 보다.

모든 것은 나를 중심으로 볼 때 내쪽으로 왔다가 간다. 사람도 나무도 별도 내 쪽으로 왔다가는 간다. 이 오고 감을 연출하는 것이 바로 시간이 아니던가. 모든 것은 이를 테면 시간의 장난감인 셈이다. 만일 시간이 흐르지 않고 멈춘다면 어떻게 될까. 꽃잎은 피지 않을 것이고, 기다리는 연인은 오지 않을 것이다. 그 무엇도 어느 곳에든 다다르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것은 시간이 작동되어야 생명활동을 하는 존재이니까. 그래서 최후의 승자는 시간이고 하는지도 모른다. 내가 시간을 비껴 서서 마치 세상 이치를 다 아는 사람처럼 그것은 그렇고 이것은 이렇다며 아무런 호기심도 없이 산다면 시간은 그런 나 같은 사람에게는 사정없이 후딱 지나쳐갈 수밖에 없는 일이다. 시간은 나와는 도무지 거래할 일이 없을 테니까. 그러니 나는 더 빨리 늙고 말 것이다.

지금 내가 바로 그런 사람이 아닐까. 다람쥐 체바퀴 돌리듯 오늘은 어제의 되풀이요, 내일은 오늘의 복사판으로 산다면 어제가 일요일이었는데, 금방 오늘이 일요일 인 것 같고, 엊그제가 작년인 듯했는데 벌써 한 해가 가는 느낌 속에 살게 될 터이다.

시간을 탓하고 시간을 덧없어 하고 시간을 구박하면서 말이다. 아무리 인생이 짧다고 해도 한 사람이 80까지 산다면 그 인생은 결코 짧다고 할 수 없다. 세상에 태어나서 80번이나 봄을 본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이를 두고 어찌 짧다고만 할 것인가.

영국의 시인 워즈워드는 나이 들어서도 무지개를 보면 가슴이 뛴다고 노래했다. 세상에 대한 호기심을 잃지 않고 그리하여 감동과 경이를 품고 산다면 시간은 어린 10대 시절처럼 아주 천천히 흘러간다는 말에 나는 동의한다. 그래서 나는 요즘 아득한 유년시절의 마음으로 돌아가려고 노력한다.

잎새를 다 떨군 가로수의 나목들이 발을 웅크리고 서 있는 모습에서 겨울 속의 봄을 발견하려 하고, 길가의 작은 돌 하나에서 밤하늘의 별똥별을 짐작하려 한다.

누군가의 모래 한 알에서 우주를 보고 순간에서 영원을 본다고 했는데, 그렇게는 못하더라도 마음 속에 어린 시절의 호기심과 열정, 감동의 끈을 놓지 않으려고 한다. 그래야만 내가 젊게 살아가는 것일 테니까. 몸은 늙어가더라도 결코 시간을 허투루 보내지 않는 젊은 혼으로 살아가고 싶다.

이 한 겨울 나무는 시방 겨울잠을 자고 있는 것일까, 하고 생각을 하다가 강물의 목표가 바다인 것처럼 세상 모든 것들의 목표는 시간의 끝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잠긴다. 시간은 본디 천천히 흐르는 것, 다만 사람이 그것을 빠르게 흐른다고 인식하는 데서 모든 늙음 현상이 일어난다.

이 글을 쓰고 있는데 라디오에서 옛날 팝송이 들려온다. ‘이 세상에 끝이 있다고 말하지 말아주어요.’

2009년0409 문화저널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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