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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석의 편지

작성자
온유한
작성일
2014-05-27 16:50
조회
4521
서유구가 사촌 동생 유경에게 쓴 편지

 

지난 가을 가뭄이 7월부터 12월까지 이어졌지. 올해도 4월까지 계속해서 비가 오지 않아 시내와 도랑은 다 말라 거북 등처럼 갈라졌더군. 농가에서는 근심하고 탄식하는 소리가 그치지 않았네. 장차 끝내 비가 오지 않으면 어찌하나  걱정들이 대단했지.

다행히 5월에 큰 비가 내리기 시작하더니 7월까지 계속되었네. 전날 말랐던 곳에 지금은 물이 넘쳐흐르고 거북 등처럼 갈라졌던 곳에는 개구리 떼가 살고 있다네. 강촌에 물이 넉넉해지니 생활도 예전으로 돌아왔네.

어제 우연히 이웃에 사는 박생과 함께 잠을 자게 되었네. 밤이 깊어 비가 쏟아지는데 시간이 갈수록 빗줄기가 거세지더군. 낙숫물 소리가 귀를 때리고, 세찬 바람이 풍경을 거세게 울리고 창문을 드세게 흔들어대는 통에 엎치락뒤치락하며 늦게까지 잠들지 못하였네.

그러던 중 문득 깨닫는 바가 있어 벌떡 일어나 박생을 흔들어 깨우고는 "자네는 오늘 이 비를 아는가? 이것은 예사람의 문장일세"라고 크게 말했다네. 박생이 무슨 소리인지 몰라 어리둥절하기에 상세히 말해주었지.

 

"지난 날 비가 오지 않은 것은 오늘을 위해 쌓아 두었던 것이고, 오늘 이 비는 지난날 쌓아둔 것이 쏟아져 내리는 것이네. 오로지 오래 축적해야 지금처럼 모자람 없이 쏟아질 수 있는 법이지. 문장도 마찬가지야. 옛날 작가들은 모두 길게는 수십 년이요, 짧아도 십여 년이 되도록 학문을 쌓고 생각을 깊이 하여 콸콸 솟아 넘쳐나고 눌러도 다 없어지지 않은 연후에야 마침내 그것을 꺼내어 문장을 지었네. 그래서 그 말이 콸콸 쏟아지고 항상 촉촉하여 마르지 않았지. 그렇지 않고 없는 살람에 하루하루 쓸 거리를 맞춰 살다 보면 머지않아 부족하여 남에게 빌리고 표절하게 되니 어찌 굶주리지 않겠는가."

 

박생이 가만히 듣고는 감탄하며 명언이라고 말하더군. 함께 웃으며 이야기를 마쳤네.

 

자네는 글을 알면서부터 나에게 배워 <시경詩經> <서경書經> <예기禮記> <춘추> 등을 읽었네. 공부한 지는 오래되었으나 근심스레 말을 잘 하지 못하였네. 내가 이상히 여기며 자네의 글을 보려고 기다린 것이 농가에서 비를 기다리는 마음보다 더 간절하였네.

 

지금 자네가 지은 글을 보니 자네는 이제야 비가 내렸군. 십 년 동안 쌓은 것이 하루에 쏟아져 내렸으니 이제부터는 자네의 글이 마를 날이 있겠는가.

 

나는 독서가 매우 빈약한데도 매일 쓸 일이 많아 글상자에 간직해 둔 글이 벌써 휑하니 비어버렸네. 이제 자네한테 빌리고 표절해야 할 판이야.

 

문장을 읽고 쓰는 일은 유자들이 받든 지행합일知行合一과 다르지 않네. 읽기만 하고 짓지 않는 것은 선가禪家들이 경經을 논하는 것과 같고, 짓기만 하고 읽지 않는 것은 양명학에서 말하는 양능良能과 마찬가지네. 나의 글은 양명학의 병이 들었고, 자네는 선가의 병이 들었으니, 서로 상대방을 보면서 자기의 병을 고치는 것이 좋겠네.

 

올해는 비와 햇빛이 일정하지 않아 너무 많이 오다가 아주 안 오다가 그러는군. 요즘 바깥소식을 들으니 농사가 흉년이 들 것 같다 하여 걱정이네. 그럼 이만 줄이네.

 

임유경의 <대장부의 삶>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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